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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May 08. 2022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올리는 기독교식 인사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약 일주일이 되었다. 오늘은 어버이날이고, 나는 나를 낳아준 데에 감사를 표할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한다.


어머니의 복부에서 종양을 발견한 것은 한 달도 되기 전의 일이다. 의사는 조직검사를 권하지 않았다. 어떠한 연명치료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가족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라는 소견이었다.


의사의 진단이 있은 이후 딸들은 장례를 준비했다. 언제쯤 돌아가실 것 같다는 예상을 했고, 필요한 물품과 경비를 어떻게 조달할지 의논했다. 크게는 상조, 연금, 보험 등에서 작게는 부고장의 작성과 검은 양말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일까지, 우리는 미리 준비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죽음과 대면하는 것은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오늘, 혹은 내일 밤이 고비’라는 의사의 말에 따라 모일 수 있는 가족들은 모두 병원으로 갔다. 코로나 시대라서,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치의 몰래 간호사가 면회를 허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머니의 숨이 남아 있을 때까지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집을 나와 족히 다섯 시간은 걸리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 두고 먼저 떠날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임종 직전에 영상통화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전화를 끊고 아이를 재우러 들어가서 왠지 이대로 어머니를 잃을 것 같다는 예감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이마를 짚거나,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니야, 아니야” 하고 못하게 막는 아이는 웬일로 울거나 떼쓰지 않고 내 품안에서 이내 잠이 들었다. 내 슬픔을 허용한다는 듯이. 


그날 밤 열시 삼십오 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서 불안한 마음에 시계를 봤을 때, 정확히 10시 35분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정말로 운명하셨다는 메시지를 읽었다. 약 십 분 전쯤 심장 박동만을 남겨 두고 서서히 모든 활력이 정지되어 가고 있다는 징후를 표시하던 통합 병동의 기계는 35분이 되자 완전한 직선을 그으며 그 주인이 완전히 운명하였다는 사실을 표지하였다. 의사는 사망을 선고했고, 자정을 넘기며 각 상주들에게는 어머니께서 83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다는 알림톡이 전송되었다. 


소천하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어머니가 비로소 비루한 곳을 떠나 안락한 곳에 머물게 되었다는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소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신자로 거듭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유가족들이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장소는, 관 앞에서였다. 입관과 발인, 화장터의 분향소. 입관 예식에서 내가 본 것은 정말로 영면했다고밖에 믿을 수 없는, 죽은 이의 얼굴이었다. 창백하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편안한 얼굴이었다. 병원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보였기에, 나는 마침내 어머니께서 안식을 얻었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스럽다고까지 느꼈다. 평소 잘 울지 않는 언니가 화장터에서 하도 울기에 물어 보았다. 왜 울어? 무엇이 슬퍼서 울어? 언니가 말했다. 이제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영원한 이별이라는 실감 때문에. 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날로 수척해지셨어도, 볼 수 있었잖아. 나는 그게 좋았는데. 언니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말했다. 언니야, 엄마는 편안해 지셨어. 그러자 언니가 대답했다. 그렇지. 그러면서 과호흡 때문에 힘들다는 언니에게 그래도 마스크가 도움이 될 거라고 내가 답했다. 언니는 나더러 T라고 했다.(MBTI말이다.)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지상에 더 붙잡고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권한이 내게 없다는 건 물론 알지만. 온전한 모습으로 부활에 이르기를. 천국으로 가셨기를. 처녀 때 유지하셨던 그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 곁으로 돌아가셨기를.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언젠가 언니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엄마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어머니에게 삶은 고행 그 자체였다. 소위 말하는 자아를 실현할 기회도 갖지 못했고 축재를 통해 세속적 지위를 누릴 수도 없었다. 평생 노동에서 해방될 수 없는 삶. 자신의 미래를 도모하기보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 일생을 내핍해야 하는 삶.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살아 온 내 기준에서 어머니의 삶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언니가 말했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많이 낳아 기른 것? 그것이 어머니의 삶의 가치가 아니었겠느냐는 거였다. 그때 나는 한창 냉담하던 중이었으므로 언니의 대답을 터무니없는, 혹은 성의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런데 기독교식으로 치러지는 장례를 경험하면서 나는 어머니의 삶이 가엾은 것이 아니라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믿는 일 뿐이다. 그 미약한 일이 창대해 질 줄로 또 믿으면서.


어머니의 죽음은 물론 슬픈 일이었고, 근 4일장을 치르면서 유가족들은 몹시 고단함을 느껴야했지만, 그러한 심정적이고 육체적인 부침에도 우리는 자주 웃었다. 모이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가끔은 소리를 낮춰 웃으라는 주의를 서로가 서로에게 주기도 했다. 망자의 미성년의 외손들은 넓은 장례식장을 뛰어다녔고, 장례식장 건너편에 위치한 다이소에 가 물건을 고르는 일을 한시적인 낙으로 즐겼다. 음식은 맛이 있었고, 식장은 많은 조문객과 유가족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으며, 백여 개의 근조화환이 조문객과 유가족의 발길이 머무는 곳을 가로수처럼 호위해 주었다. 어떤 이들은 상중에도 살이 쪘고, 어떤 이들은 꼼꼼하게 화장했다.(딸들 중에 화장을 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모자를 썼다.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밥솥을 열어 보고 눌어 버린 밥알을 보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시간이 이만큼 흘렀다는 실감을 했다. 눌은 밥과 함께 구운 생선과 나물로 아이 밥을 먹이고, 꼼꼼히 목욕시킨 다음 늦지 않게 재웠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의 과제를 계속해서 풀어나갔다. 다음 날은 종일 청소와 빨래를 했고, 다음날은 무심코 들이닥친 피로와 슬픔에 잠겨 한나절을 보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배가 고팠다. 예의 바르게 굶을 수는 없는 걸까? 애통하게도 나는 허기를 느꼈고 갖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품었고, 해내고 싶은 일들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남기고 간 것은 삶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올라와서 성경책을 샀다. 아마도 가장 고가에 드는 성경이다. 나는 8년 전에도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때 이와 거의 유사한 성경을 산 적이 있는데, 고통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비싼 값에 중고로 처분했다. 시조새와 “빛이 있으라.”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는 사람. 마음으로는 믿고 싶지만, 머리로는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지점을 남겨 놓고 마는 사람. 창조론과 진화론을 동시에 인정하는 사람. 자유의지를 중시하고, 환난 속에서 어김없이 ‘선한 계획’을 체험하고 마는 사람. 무신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 지성의 결함, 몽매주의...이런 평가들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 나였다. 하지만 이번 장례를 통해 나는 나의 신심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께서 남기고 떠난 사람.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믿음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믿음만 가져가고 싶다. 내가 남긴 것들을 지키고 싶다. 가능하면 오래 지키고 싶다. 나의 부재가 누군가에게 재난이 아닐 수 있는 때에, 떠나고 싶다. 이왕이면 천국으로 가고 싶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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