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책을 처음 읽었다.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타지 않았더라면 한강의 책이 독서모임 책으로 선정되지 않았을지 모르고, 혹여 지인들에게 그녀의 책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구지 찾아서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다행히 그녀는 노벨문학상을 탔고, 그녀의 책이 내 손에도 들어왔다.
소속된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인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한강의 책은, ‘소년이 온다’를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으라는 소리가 있지만, 독서모임 전에 읽고 가야 하니, 순서 상관없이 한강 책으로 이 책을 가장 먼저 접했다. 벌써 수 년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신간으로 나왔을 때, 지인이 그 책을 감탄하며 추천하였던 기억이 난다. 추천한 지인의 진중한 표정에 읽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금새 잊혀지고 읽지 못했다. 그러던 한강의 책이 시간을 돌고돌아 드디어 내 손에 왔다.
책 초반에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경하의 모습,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자세와, 임박한 죽음 앞에서 얼핏 이기적으로 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p.14)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2021, 문학동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누가 누구에게 예리한 칼을 꺼내들었는지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너무 가까웠던 사람들 사이에서 예리한 칼날이 오고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베인 것 같은, 죽음이 바로 앞에 당도한 것 같은 처참한 슬픔을 겪으면서 그것이 죽은 이를 위한 애도인지, 베인 자신의 상처에 대한 애도인지 헛갈릴 것 같은 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작가가 우리의 삶을 어찌 이렇게 깊숙이 표현해 주었는지 감탄하며 읽기를 시작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다. 흰 눈, 흰 새, 그리고 핏방울, 그리고 새의 깃털의 연한 무늬가 새겨진 담담한 아름다움을 가진 그림을 보는 정서가 이어지는 가운데, 경하와 인선, 그리고 정심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책의 사실적 배경의 제주 4.3 사건이다. 전쟁의 광기 가운데 수만명의 무고한 제주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흔적도 없이 죽임을 당한다. 어디에 항변도 하지 못하고 가족의 몰살을 겪고 이웃의 몰살을 경험한다. 이들의 찢기고 짓밟힌 삶, 끝없는 고통과, 살아 남은 이들이 살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겪는 고통을 이야기한다. 마치, 인선의 잘린 손가락이 3분에 한 번씩 찌르는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것처럼. 잘린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서 끝없는 고통이 가해져야 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경험하고 남은 이들은 살기 위해서 그 고통을 껴안아야만하는 운명이다. 고통을 외면하면 숨쉴 수 없는 한 여름의 더위 속 극심한 우울증이, 그리고 고통을 껴안으면 깊은 눈길을 헤쳐가야하는 차가움이 있다면 도대체 그들은 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가까이 보아도, 스치듯이 보아도 끔찍한 사건, 해결되지도 해결될 수도 없는 사건과 동행하며 살아야 한다면?
경하와 인선은 작별하지 않는다. 무엇과? 아픈 과거의 사건과? 그 때 희생된 사람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과? 그들은 아픈 과거를 그저 껴안고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너무 처참한 사건을, 미학적 관점으로 승화시킨다. 경하와 인선이 끝내 살아 남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들이 살아서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영화를 통해 제주 4.3사건을 알릴 지 그러하지 못할 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강은 그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 제주 4.3 사건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독자들의 마음에 각인시켰다.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지, 어떻게 받아들일지, 혹은 저마다의 4.3 사건과 어떻게 화해할지는 독자의 몫이지만, 일깨우는 돌멩이는 이미 던져졌다.
벌써 한달도 더 전에 읽고 남긴 기록이다. 그러고 난데없이 2024년 12.3계엄선포가 있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책에서나 읽던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건가? 역사의 시간이 거꾸로 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사실 정치에 별 관심 없이 살면서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집 뒤에 군사시설이 있어서 종종 군비행기가 뜨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 전,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느닷없이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창밖으로 하늘을 샅샅이 살피며 불현듯 깨달아졌다. 12.3계엄선포가 평온한 삶에 침투한 것을... 대수롭지 않은 비행기 소리, 심지어 다른 기계음을 착각한 비행기 소리가 평범한 삶을 깨뜨리며 불안감을 불러 올 수도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