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직합니다.
대내외 커뮤니케이션 준비해 주세요.”
대표님께서 나를 불러 앉힌 후 바로 말씀하셨다.
“네???”
너무 놀라 소리를 크게 냈다.
이 회사에서 몇십 년 근무하셨고 회사에 대한 애정이 매우 크셨던 분이라, 은퇴가 아닌 이직은 상상도 못 했기도 했지만,
대표님이 선수를 치셨다…
머리가 깨지는 몇 달간의 고민 끝에, 몇 주 전에야 회사를 나가기로 마음먹었던 차였다. 언제 통보할지, 언제 그만두는 것이 유리할지 머리를 굴리며 타이밍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몇 주 동안 대표님 지시대로 대내외 커뮤니케이션, 임직원 타운홀 등의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정신없이 일처리 하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 끝까지 치고 올라갔던 퇴사에 대한 강한 의지가 약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퇴사하기로 한번 마음을 먹은 후에는 그 결정이 나의 뇌를 온통 지배하여, 주변의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던 터였다.
그냥 대충대충 다녀.
뭘 그렇게 일을 많이 하려 해.
이만한 직장이 어디 있어.
대책 없이 왜 나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배부른 소리인가. 나가도 대책 없지만 여기서도 대책이 없다고 느낀다. 투자 없는 회사. 나의 업무와 역할, 자원은 8년 동안 변한 게 없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을 것이다. 밖에서는 그럴싸해 보이는 회사,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는 구조. 매번 경제적인 이유로 눌러앉았다.
어느새 돈을 넘어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다. 지금 어떻게 보내느냐가 나머지 인생을 좌우할 것 같다. 이 시간에 내가 더 의미 있는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하는데 비워지지 않으니 다른 걸로 채울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는 걸까?
대표가 흐름을 끊은 것인지,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흐름을 바꿔놓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50대 후반까지도 일할 팔자라더니. 예전에도 그랬다. 내가 마음을 먹고 그만두고자 하면 매번 무슨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기회가 생길 것처럼 해서 그만둘 수 없거나, 갑자기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서 섣불리 나올 수 없게 되고 때를 놓치거나.
긴 연말 연휴 동안 나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지난 커리어 인생도 되돌아보았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약 25년 이상을 큰 공백 없이 꾸준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밥벌이하고 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학창 시절 해외에서 몇 년을 보내 영어로 나불거릴 정도는 되고,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다양한 커리어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지라 주변인들의 커리어가 주요 가이드가 되어 월급쟁이 직장 생활이 최선인가 보다 했다.
뚜렷한 커리어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능력이 특출 나지도 않지만,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자립, 결혼 후에는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종속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인생 목표(?)를 가지고,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으려 나름 노력하며 계속 나아갔다. 능력 대비 시대의 흐름을 운 좋게 잘 타서, 남들 눈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외국계 기업과 국내 기업을 옮겨 다니며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과 기대에 비해서는 의지가 박약하여, 스펙터클 하거나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성공적인 커리어 트랙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리 큰 굴곡 없는, 이만큼의 무미건조한 커리어 인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꾸준한 인내와 노력이 있었다.
돈보다는 일의 재미가 중요하다고 꼴값을 떨면서, 일이 재미없어지거나 미래가 안 보인다고 판단될 시점에는 회사를 나왔다. 공교롭게도 평균 5년 주기로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버티는 것도 능력인데 그 능력 더 발휘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회사가 9년 차이니 제일 오래 다닌 셈이다. 중간중간에 한두 차례 내가 여기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회의가 들면서 더 작은 회사라도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나를 더 필요로 하는 회사로 찾아 떠날까 고민도 했었지만, 그때마다 회사에서 희망적인 변화의 조짐이 보이거나 (결과적으로는 아니었지만),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일 때는 이만한 회사도 없다고 합리화하며 머물렀다.
지금의 커리어는 내가 기대했던 50대의 커리어와는 거리가 멀다. 어엿한 조직과 팀원을 거느리는 위치에서 조직의 성장 비전을 제시하고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직원들이나 후배들의 커리어 성장을 이끌어주는 커리어는 이제는 멀게만 느껴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쥐꼬리 만한 예산으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부서에 있다 보니, 여전히 업무 확장과 같은 중간관리급에서나 고민할 법한 수준의, 지금 자리만큼의 커리어 고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작게 느껴졌다.
그러다…
새로운 해의 기운의 변화인지…
새해 들어 나이 숫자를 보고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누구의 힘을 빌린 건지 마구 큰 소리를 낸다.
5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무슨 커리어 타령이냐.
무난한 커리어 트랙 주제에 커리어, 열망, 조직… 아이고 욕심도 크다. 이 나이에 잘리지 않고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라.
머리가 잘 돌아가는 한 붙어 있어라.
조금이라도 조직에 민폐가 되고 있다고 판단되면 나와라. 아니지, 뭘 나와. 이것도 배부른 소리이지.
예전에 회사에 대해 볼멘소리를 할 때마다 남편이 너무 애쓰지 말고 회사에서 발로 밀어낼 때까지 있으라고 할 때는 자존심 운운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펄 뛰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리 자존심 상할 일인가? 물론 기분은 좋지 않겠지만,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 실속 아닌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에만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재미까지는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할 수 있고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조직이 요구하고 바라는 일이라도 잘 수행하는 것에 만족하자.
사람 앞날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새로운 대표가 어떨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고, 하루하루를 마음잡고 살아가다 보면, 막막하더라도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가고 있겠지 스스로 격려해 본다.
동시에 지금 회사 이후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조금씩 준비를 하자.
지금 힘을 얻은 내 안의 목소리가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좀 편안해졌으니 헛된 소리는 아니겠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연초에 회사에 출근하니 사람들이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작년에는 얼굴이 까칠하더니, 왜 이렇게 좋아졌어요? 화장품 바꿨어요?‘
마음이 편하니 얼굴에도 나타나는가.
‘화장품 말고,
마음을 바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