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에세이
*이 수기는 초보의사이자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겪었던 필자의 종교적 체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밤, 점점 싸늘해지는 병원 기숙사 방에서 독서를 하던 중 정적을 가르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당직을 서고 있던 인턴 동기 형이었다. ‘그분 방금 임종하셨어. 지금 사망 선언하려고 하는데 만약 오려면 빨리 와.’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이때를 대비해 그날 오후 미리 다려놓은 셔츠와 가운을 꺼내 입고 병원 건물을 향해 출발했다.
그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인턴 의사로 두 달간 부산 기장으로 파견을 와서 처음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6개월간 서울에서 햇병아리 의사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해왔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맡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평일 밤 당직은 병원에 있는 의사 수가 낮시간에 비해 현저하게 적어서 매우 바빠 잠도 거의 청하지 못하는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 환자는 72 병동에서 온 첫 번째 호출이었다. “선생님 여기 오른쪽 옆구리에 담즙 배액관과 복수 배액관을 가진 환자분이 있는데 많이 새서 요까지 다 젖었네요. 드레싱 빨리 부탁드려요.” 나는 그 순간 61 병동에서 혈액배양 술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일단 “알았습니다. 이것 마무리하고 최대한 빨리 갈게요.”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요까지 젖을 정도로 새고 있다는 의미는 다음날 아침 관을 새로 위치시키는 재시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밤을 새 가면서 서너 시간마다 드레싱을 반복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거즈와 종이테이프, 소독약을 가득 드레싱 세트에 담고 팔꿈치로 병실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갔다.
환자는 70대 할머니 었다. 나를 보자마자 어쩔 줄 모르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쁘실 텐데 정말 미안합니다.”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가슴은 너무 말라서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가 피부 밑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복부는 복수로 볼록하게 불러있어서 마치 TV 속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와 같은 체형이었다. 복부에 그려진 수많은 유성 사인펜 자국과,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머리카락은 그동안 수없이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벌써 복부의 반을 덮고 있는, 테이프로 덕지덕지 고정시킨 거즈 뭉치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는 도중에 다른 병동에서 호출이 왔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고, 저 드레싱을 밤새 적어도 세 번을 해야 한다는 걱정이 먼저 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괜찮다는 대꾸도 어영부영한 후 장갑을 착용했다. 테이프를 조심스레 뜯고 거즈를 열어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복수 배액관이 오래되어서 관 주변 구멍이 커졌기 때문에 복수가 관 옆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독을 시도했는데 소독약을 바르자마자 복수가 새어 나와 소독약을 씻어 내려가 바르는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허리를 굽힌 채로 수번을 반복 소독한 후 Y자 거즈를 재빨리 관 입구에 끼고, 거즈를 수십 장을 켭켭히 댄 후 종이 플라스터로 덕지덕지 바르고 나니 내 당직 복도 땀이 젖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끔한 드레싱의 뿌듯함도 잠시, 수시간 뒤 또 젖어서 호출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드레싱 물품과 젖은 거즈를 한 뭉텅이 들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하는 환자의 목소리는 병실 문이 닫히면서 잘렸다.
그날따라 왜 이리 호출이 많았을까. 정신없이 일하고 당직실 간이침대에서 기절해서 두어 시간쯤 잠든 나를 핸드폰 벨소리가 깨웠다. 비몽사몽 번호를 보니 72 병동, 핸드폰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확 밀려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드레싱 재료를 챙겨 터덜터덜 병실로 걸어갔다. 환자 얼굴은 보는 둥 마는 둥 한 채 배로 눈길을 주었다. 아까 전 꼼꼼하게 쌓아놓은 거즈가 누런 복수로 모조리 젖어 있었다. 문득 환자의 얼굴로 나의 시선이 옮겨갔는데, 기미와 주름이 가득한 그분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표정을 지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장갑을 끼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쏟아지는 잠과 피로로 간신히 드레싱을 마칠 무렵, 서서히 새벽 햇살이 병실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환자의 얼굴 뒤로 산소 패널 연결 부위에 걸린 십자고상에 보이기 시작했다. 수 동안 시간이 정지한 느낌이었고. 그제야 옆 선반에 매일 미사 책자와 묵주와 성경이 보였다. 아,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제가 짜증내고 한숨 쉬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보고 계셨을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7개월 전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주님의 도구가 되어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린 것이 기억났다. 몸이 조금 힘들다고, 잠을 조금밖에 못 잤다고 밤새 짜증내고 살짝 화까지 난 내가 진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십자고상의 예수님이 저에게 말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장 40절)” 당황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는 환자분께 세례명을 물었습니다.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그분에게 나도 신자라고 밝히고 얼굴을 붉히며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평일 일과 시간에도 62 병동과 72 병동을 전담하게 되었다. 자매님은 아침 8시, 저녁 6시에 기본적으로 드레싱을 해 드려야 했고, 며칠 뒤 담즙 배액관이 막히지 않도록 생리식염수를 하루에 두 번 주입하여 개통성을 확인하는 일도 추가되었다. 그런데 배액관의 성능도 그렇게 좋지 않아서 멸균 생리식염수를 넣을 때마다 옆으로 줄줄 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드레싱을 두배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췌장암 말기였고, 과장님께서 작성해놓으신 의무기록을 읽어보니 전신 전이로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고, 단지 한 달 남짓 남은 임종만을 기다리며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최선의 치료였을 뿐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동행을 시작했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같이하면 서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자매님의 깊은 신앙, 간병하는 가족들에 얽힌 이야기, 기장군 토박이로서의 삶을 들었다. 저는 대학교 때 세례를 어떤 계기로 받게 되었는지, 최근 과학자이신 아버지가 세례를 받아 신앙이 깊어지시는 것에 대한 자랑, 의대를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말씀드렸다. 자매님은 믹스커피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기에 저는 커피 맛 영양제를 시도할 수 있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물론 맛이 기대했던 것과는 좀 많이 달라 금방 복용을 그만두었지만.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그분의 컨디션은 점점 악화되었다. 폐로 추가적으로 전이가 되어서 숨 쉬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고, 항상 산소를 흡입하게 되었다. 배액관들에서 체액이 세는 것도 점점 심해졌고, 드레싱에 사용하는 거즈 양도 점점 늘고 주기도 짧아졌다. 굳이 의료 지식이 없어도 자매님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것은 명백했다.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점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기에, 우리는 활발히 대화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침묵이 더 깊은 공감과 배려를 포함하고 있는 언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는지도. 어느 날 자매님은 창 밖의 먼 산을 보시면서 묵묵히 드레싱 하는 저에게 문득 말했다. “선생님, 지금 저에게 매일 해주신 고생에 대한 상은 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 부탁드려 놓을게요.” 드레싱을 마치며 나는 정리한 답을 천천히 말했다. “저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걸 마련해주셨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자매님께서는 환히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마지막 날은 갑작스러운 호출로 시작되었던 만남과 같이 새벽 72 병동에서 드레싱을 해달라는 급한 호출로 시작되었다. 막상 가 보니 어제까지도 앉아있을 수 있었던 자매님의 상태는 밤새 극도로 악화되어 의식을 서서히 잃으셨을 뿐만 아니라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었다. 온몸도 오한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따님의 품에 안겨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10년 전 배낭여행을 갔을 때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보았던 피에타 상의 데자뷔를 보는 듯했다. 한 달 동안 지켜본 의료진의 마음도 미어지는데 평생을 같이한 어머니를 떠나보내려는 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눈물이 그렁그렁한 딸은 저를 가만히 올려보더니 시선을 어머니의 얼굴로 떨구었다. 섬망이 시작되어 보호자와 의료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자매님을 앞에 두고 드레싱을 하려니 눈물이 차올랐다. 이번 드레싱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감정이 벅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고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드레싱을 마친 후 환자 모니터를 수분 지켜본 뒤 따님과 막 병실에 들어선 아드님과 눈빛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침묵 속에 병실을 떠났다.
새롭게 다린 셔츠와 가운을 입고 임종실로 들어섰을 때, 아드님이 나를 보고는 선생님은 당직이 아니더라도 오실 줄 알았다고 말을 건넸다. “어머니! 어머니가 정말 좋아해 하던 선생님이 마지막 인사하러 오셨어.” 자매님은 더 이상 숨을 가쁘게 몰아 쉬지도 않았고, 몸을 떨지도 않았다. 하얀 병원 이불을 덮은 채 단정한 자세로 평안하게 누워서 묘하게 신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그녀가 주님의 평화 안에서 안식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순간만은 의사라는 직업적 책무에서 벗어나 준비했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꼭 잡고는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주님의 평화 안에서 평안히 안식을 취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와 방금 우리 곁을 떠난 한 영혼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다 잠이 들었다.
한 달 동안 자매님과 보낸 시간이 어찌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주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되었고,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각자 안에 담고 있다고 믿는다. 자매님과 함께 보낸 시간과 노력이 죽음을 통해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 보일 수도 있으나, 자매님의 속에 숨어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고, 내가 한 그 수많은 드레싱을 통해 저는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며 우리를 서로 그 드넓은 사랑으로 연결시킨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 문득 그분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럼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치곤 한다.
자매님, 주님의 평화와 사랑 속에서 안식을 찾으셨기 바랍니다. 저도 이 세상의 삶이 끝나 곧 주님에 품 안에서 만났을 때 반갑게 인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겠습니다. 그 순간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질병의 고통에서 치유하는 하느님의 손끝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