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에세이
“어르신, 많이 아프진 않으셨어요?” 배에 복수 천자 바늘을 꽂은 후 노란 액체가 관을 따라 원활히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항상 묻곤 했다.
“괜찮아. 예전에 시장바닥에서 하루 종일 꽁꽁 언 손을 내 입김으로 녹이며 나물 팔 때 생각하면 잠깐 따끔하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여. 그때 고생 많이 했지. 그래도 사주는 단골들이 있어서 고마웠어. 그 나물 팔아 얘 아버지 학교도 다니고, 조그마한 가게도 샀지.” 내 질문이 항상 시발점이 되어 어르신은 항상 아기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옛날이야기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면 간병하던 손녀딸은 “아이고. 우리 할머니 옛날이야기 보따리 또 터졌네.” 하며 그분의 흰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까르르 웃는 것이었다.
의사 면허를 발급받고 인턴 의사로 처음으로 근무하게 된 곳은 신경외과 병동이었다. 그 어르신은 내가 처음으로 배에 플라스틱 관을 삽입하여 복부에 찬 복수를 제거하는 시술을 한 분이었다. 글과 사진으로만 배웠던 복수 천자 시술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당연히 서툴러 그분을 하루에도 여러 번 바늘로 찌르곤 했다. 환자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그분은 항상 웃으며 “의사 양반, 천천히 또 해봐. 난 시간 많아.” 하며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며 웃음을 선사하는 감사한 어르신이었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이 쌓여 있지 않으면 가끔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매번 비슷하면서도 변주되는 다사다난한 그녀의 삶 이야기를 듣곤 했다. 손녀딸의 맛깔난 추임새도 곁들이면서.
시장 구석에서 나물 파는 노점으로 시작해 조그마한 가게를 사고, 가게에서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사람을 소중히 여겨 사업을 확장하였는데, 결국 채소 및 청과를 취급하는 도매점을 인수하고, 지금은 강남에 조그마한 빌딩 하나 샀더니 손녀딸이 시중드는 사치스러운 삶을 산다는 해학적인 마무리로 끝나는 그 인생역정을 듣고 있자면 남대문 시장에서 건어물 도매로 성공하셨지만 편한 생활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신 그리운 친할머니를 마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항상 이른 봄 햇살이 병실 창문으로 비추었다. 어르신의 신난 목소리와 어우러진 밝은 병실의 이미지는 끊임없는 긴장과 피로의 연속이었던 첫 달 인턴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3월이 끝나갈 무렵 어르신은 내과 병동으로 옮기게 되었고, “또 봅시다. 의사 선생!”이라며 손을 여유롭게 흔들어주었다.
일주일 후 나는 처음으로 사망 선언을 해달라는 호스피스 병동의 호출을 받고 도착한 임종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너무나 익숙했던 세 글자가 문 옆 환자 성함 칸에 끼워져 있었다. 왜 하필 내가 처음으로 사망 선언을 해야 하는 환자가 이 분이어야만 했을까.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노크 후 문을 열었다.
침상에 기대어 엎드려 있던 손녀딸은 나를 보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르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부처님이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던 의사 선생님을 마지막 길 배웅하라고 보내주셨어!” 그 말을 듣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내 모든 힘을 안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동공 반사 확인, 심전도 확인, 그리고 흉부 청진. 마침내 고단하지만 행복했던 이야기를 괜찮은 결말로 마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평안한 미소를 바라보며 의사로서 처음으로 사망 선언을 했다. 왜 어르신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의료인이 나여야만 했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운명이나 인연이라는 것은 없으며 확률만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을 왜곡해서 신비주의적 단어로 인식하는 비이성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드넓은 우주에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관계에 좋고 나쁨을 떠나 경탄할 만한 기적이라고 믿고 싶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순간과, 그 순간에 얽혀 있는 관계의 상호작용을 소중한 기적이라고 믿는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풍부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고, 그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 더 나아가 내가 등장하는 모든 이의 이야기는 사소한 기적이 계속되어 해피 엔딩을 향하기를 오늘도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자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