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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제 Apr 06. 2016

길은 어디로든 이어진다

너에게, 그리고 과거의 나에게

정말 오랜만이지. SNS에 기억의 한 조각으로만 남아있던 너와 우연히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에단 호크와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리얼리티 바이츠'였어. 내 기억 속에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대학에 입학한 스무 살 새내기였던 너는 이제 나보다도 더 영화를 많이 본 스물세 살의 대학교 졸업반이 되어있더라. 3년이라는 시간이 사람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고 깊이를 더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어.


좋아하는 거 하나하나 하다 보면 언젠간 너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지? 오늘은 날씨도 좋고 잠도 안 오고 라디오에서는 좋은 노래가 흘러나와서 그냥 그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해


난 스무 살 때부터 인생이라는 게 너무나 두려웠어. 정확히 말하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세상이 너무도 무섭더라. 내가 과연 세상에 나와서 일이라는 걸 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내 가슴을 항상 짓눌렀던 것 같아. 회사를 다니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무서운 적들과 싸워나가는 장수들 같아보였지. 그래서 두려움에 이것저것 많이 했던 것 같아. 그 불안감을 견딜 수 없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살았지. 유통관리사, 물류관리사, 국제무역사 등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격증들을 무슨 갑옷이나 되는 것처럼 겹겹이 껴입고 나는 이제 어떤 공격에도 죽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런데 신기하게도 진짜 세상을 살면서 내가 가진 무기가 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말 좋아해서 했던 것들이 나를 지금 내 모습으로 만들었어.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이 좋아서 밴드를 시작했어.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사람들을 만나서 밴드를 계속했지. 그때 만난 사람들과는 세상 둘도 없는 친구들이 되었어. 신기한 건 말이야 밴드를 한 경험이 인생에서 큰 도움으로 찾아오더라? 내가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6개월쯤 살았을 때였어. 가진돈도 다 떨어지고 직장도 안 구해져서 멀리 농장으로 가서 일이나 하려고 했어. 그러던 도중 우연히 한국영사관에서 주최하는 한국영화제의 자원봉사자 모집 홍보전단을 보게 되었어. 어학원이 끝나고 할일도 없고 시간이 남아돌던 나는 영화제 준비기간 내내 크게 도울 일도 없는데 매일 영사관에 나가서 사람들을 도왔지. 그러던 중 영화제에서 개막공연을 해야하는데 음향장비를 운용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어. 사정상 전문가를 고용할 수 없어서 한국에서 밴드를 한 경험이 있던 내가 그 일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 일을 하면서 영사관의 총영사님의 눈에 띄게 되었고 고맙게도 영사관에서 인턴을 할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기업 입사 지원 시 제출할 추천서도 써주셨어. 재미있지 않아? 몇 달 동안 공부해서 얻은 자격증보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좋아하는 일로 이어져서 받은 추천장이 더 큰 도움이 됐다는 게 말이야.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어. 영화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좋아했지. 영화가 너무 좋다 보니 영화를 직접 찍어보게 되었어. 영화 제작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생각난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어. 그리고 이 브런치라는 블로그에 영화 제작을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글로 남겼지. 그런데 어느 날 '탐구 토끼'님이라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어. 브런치 북에 선정돼서 책을 쓰게 되셨는데 취미에 대한 글을 쓰신다고 하시며 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 그리고 오늘 그분의 책이 나왔고 그 책에 내 이야기가 한 꼭지로 소개가 되었어. 글을 쓰는 걸 좋아해서 브런치를 시작했고, 영화를 좋아해서 찍었더니 이렇게 새로운 경험이 또 찾아오더라. 그래서 나도 브런치에서 하는 브런치 북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혹시 또 모르지 이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는 모르는 거니까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하나하나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어서 하다 보니 그로 인해 연결되어 생기는 새로운 경험들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매일 밤 10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하는 일상에서도 작곡을 하고 글을 쓰고 밴드를 하고 영화를 찍고 있어. 또 3년이 지났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일지 나도 너무 궁금하단다.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네 모습이 어떨지도 너무나 궁금해.


작년에 친구의 지인이 하는 제주도의 펜션에 놀러 간 적이 있어. 국내 유명한 대기업의 인사팀에서 일하다 그만두고 펜션 경영을 하기 위해 내려가서 일을 하고 있더라구. 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계약이 끝나면 다음에는 목표가 뭐냐고 물어봤어. 그랬더니 그분이 크게 웃으시며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라

대기업을 다니거나 좋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꼭 그 질문을 해요. 그런데 자영업을 하거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여기 와서 살다 보니 새롭게 할 일들이 생겨요. 옆 감귤농장에서 모양이 안 예뻐서 못 파는 감귤 박스로 잼을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렸더니 사겠다는 사람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팔아보니 수입이 꽤 됐어요. 여기 살다 보면 또 그런 것들이 생기겠죠. 다음 목표만을 생각하다보면 언제 현재를 사나요?


어때? 재미있지 않아? 나는 너에게 현실의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꿈만 좇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 현실은 냉정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은 고민해야 돼. 그런데 말이야 고민은 하되 너무 그렇게 불안해 하거나 걱정하지는 마. 네가 생각하는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길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는 과정들 속에서 네가 경험했던 것들, 그리고 좋아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또 다른 길을 만들어 준단다. 그 길이 더 아름다울지 아닐지는 모르는 거야.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말고 좋아하는 일들을 마음껏 즐겨봐. 잘자고 좋은 꿈을 꾸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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