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내향성 외향성에 대한 시대적 인식
지리나 문화, 역사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정착 농경 생활에서는 외향적인 사람보다 내향적인 사람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70세 어른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새로운 농사 기술을 전파하거나 홀연 마을을 떠나 전국을 유랑하는 것을 칭송하는 문화는 최근의 현상이다. 변화가 적은 정착 공동체 사회에서는 기존의 질서를 습득하고 유지해서 공동체가 ‘매끄럽게 잘 굴러가도록’ 절제, 겸양, 인내, 숙고하는 개인이 더 필요하다.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모난 돌’은 개인에게도 공동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산업 자본사회를 맞이하며 사회와 개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경제와 교육의 주체였던 가정은 분업화되어 경제는 기업으로, 교육은 학교로 이전되었다. 개인은 평생 가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손에 꼽을 정도인 익숙한 가정과 공동체에서 벗어나 큰 익명의 사회로 던져졌다. 나날이 수십, 수백 명의 사람과 마주치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과 조우한다. 유행은 빠르게 변하고, 지식은 나날이 증폭한다.
이런 시대에 과묵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믿음직스럽고, 홀로 숙고하는 사람이라고?
바야흐로 20 세기 산업 자본 사회라는 외향적인 사람들을 위한 신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개방적, 사교적, 적극적, 저돌적, 명랑, 쾌활, 도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 외향적인 사람들은 물만난 고기가 됬다. 돌연 사회는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살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명랑하고 쾌활하게 도전하라고 한다.
내향적인 사람이 물러난 자리에 외향적인 사람이 들어섰다. 반면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공부벌레, 얼간이, 외톨이, 부적응자와 같은 꼬리표가 붙여졌다.
내향적인 사람은 인류의 1/3 에서 반 정도를 차지한다. 도전과 모험으로 대륙을 개척해 온 서구 문화권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니 농경 사회나 겸손과 인내를 미덕으로 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70~80%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내향형이 이렇게 많았던가? 어디를 봐도 자신감 넘치고, 흥겹고,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80%는 왠 말인가.
딸아이가 어린 시절에 읽던 한 동화책의 주인공은 외향적인 친구들로 이뤄진 친한 친구 무리에서 소외되어 슬퍼하고 있었다. 그 때 어른이 “그럼 친구 없는 친구를 찾아봐”라고 조언한다. “에이, 그런 친구가 어디 있어요!”했지만 혹시나 싶어 친구없는 친구를 찾아본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 쪽에 친구없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저기 있군, 하며 다가가는데 저 쪽에 또 친구 없는 친구가 있다. 저 쪽에도, 저 쪽에도.. 알고 보니 친구없는 친구가 친구 있는 친구보다 더 많았다. 결국 주인공은 친구없는 친구를 모아 친구있는 친구보다 더 큰 연합체를 결성한다. 애초에 주인공을 소외시켰던 못된-외향적인- 친구는 결국 자신도 이 쪽에 끼워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은 ‘NO!’라고 답함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실제로도 친구 없는 친구가 많을까? 친구있는 친구의 화려함과 소란스러움에 가려 친구없는 친구는 어지간하면 눈길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진 지금 친구없는 친구를 찾아보면 의외로 많은 수를 차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향적인 아이들은 이처럼 무관심의 대상, 더욱 심각하게는 문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20세기 이후 사회는 개인에게 외향적일 것을 요구한다. 기술의 빠른 변화, 유행의 범람, 만나는 사람의 증가하는 사회에서 말이 없고 느리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은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이 아니다. 밝고, 명랑하고, 깊이보다는 표면에 집중하는 것이 급박한 사회에서 적응하기 더 유리하다. 그렇다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콰이어트』에서 수전 케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한 주제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힘으로 그 분야에서 큰 업적을 달성한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보면’ 내향적이라고 한다. 혼자만의 상상과 관점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남들과 어울리기 어려울 정도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많다. 떠들썩하여 ‘실속이 없는’ 외향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선뜻 다가가기 어렵지만 일단 가까워지고 나면 누구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사람도 내향적인 사람이다. 외향성이 강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 같은 성공한 기업가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끄러움이 많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경영의 그루 피터 드러커는 “내가 지난 15년간 만나보고 함께 일해본 가장 효율적인 지도자들 중 일부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냈고 일부는 극도로 사교적이었다 … 내가 만난 효율적인 사람들의 한 가지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에게 ‘뭔가’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카리스마’가 없었고 그 말 자체도 거의 안썼으며 그 단어가 뜻하는 바대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시대적 인식이 변한 듯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의 실질적인 가치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조용한 실속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어느 곳에서나 통한다!
치밀한 계획없이 일을 벌리는 상사나 동료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사람들에 둘러쌓여 시간을 보낸 뒤 헛헛함을 누구나 느껴봤을 것이다. 반면 구석에서 존재감없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놀랍도록 편안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이 외톨이에게서 따뜻함을 느낀 것이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 내향성이라는 속성이 주는 ‘필연’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재미없고, 쓸데없이 진지하고, 예민하고, 걱정이 많다. 하지만 진지하고, 몰입하고, 책임감있고, 믿음직스럽고, 공감하는 대가들이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장착된 면모는 사회적 인식과 다르게 사회나 관계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크나큰 자질이다.
나는 평생을 사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상당히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따라 다니던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의 진원지를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을 꽤나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조용히 내면을 바라보는 혼자만의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의미있고’ ‘진지한’ 모임이 아니라면 즐겁기보다 오히려 에너지가 소진된다. 평생 감추고 살았던 나의 본성을 중년이 되어서야 발견했다.
선입견과 다르게 외향적인 성향이 무조건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 없고, 내향적인 성향도 문제라고만 볼 수 없다. 내향성 외향성은 가치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어디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성향일 뿐이다. 외향적인 아이들은 새로움 속에서 배우니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지만 진득하지 못하고 흥미가 계속 바뀐다. 진지하지 못하니 공감력이 떨어진다. 내향적인 아이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한 가지를 깊이 파고 든다. 외향적인 아이들은 외형적인 변화를 즐기고, 내향적인 아이들은 내면의 변화를 즐긴다.
내향성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은 그대로 내향적인 아이, 늦된 아이들에게 투영된다. 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향적인 사람을 향한 비뚤어진 시선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들의 ‘실속’처럼 늦된 아이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걱정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강한 잠재력을 응축한 외유내강형이 바로 이 아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