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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X Writing Lab Jan 03. 2020

육아, 상처 입은 내면 아이와 마주하기

수전 케인은  “외향형 이상주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난 뒤로 저는 상상도 못 했던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나 또한 외향형 이상주의를 버리자 상상도 못 할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다. 



늦되고 내향적인 아이들의 가치를 알게 되자 딸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사뭇 달라졌다. 느림이 이해된다. 왜 그리도 변화를 거부했는지 알 것 같다.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예민함과 섬세함이 딸의 세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동력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무엇에 앞서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난 평생 외향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위기를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에 나를 맞춰왔다. 맞지 않는 느낌, 어색한 느낌, 주저하던 느낌, 두려움, 외로움이 일었지만 외향성에 대한 맹목적인 확신이 있었기에 애써 이 감정들을 외면했다. 



내 마음속의 소리는 ‘일리 있는’ 외침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벗어버리라는 솔직하게 아우성쳤다. 하지만 이 소리를 외면했다. 나를 직시하기보다 ‘더 외향적’으로 노력하자는 다짐으로 결론 냈다. 



난 세부적인 고려 없이 빨리빨리 진행하는 문화가 힘들었다.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 입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아무 말이나 쏟아내며 생각을 정리하는 외향적인 사람과 다르게 나는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해력이 느리다, 반응이 느리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나는 홀로 있는 걸 즐긴다. 혼자의 활동으로 하루를 의미 있게 꽉 채울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홀로 있으면 외로운 사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왜곡된 시선에 나를 가두었다. 군중 속에서 어색했고,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가벼운 관계가 반복될수록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일이 늘어난다. 



나는 오래 숙고하고 깊이 생각하면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감정이 세밀하고 예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디테일에서 벗어나 큰 그림을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작은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전체에 만족을 할 수가 있지? ‘대범한’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일개 ‘짜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안정 지향적인 사람이다. 도전하는 사람의 열매가 있는가 하면 한 자리에서 깊이 파면서 얻는 열매가 있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껍질을 벗고 나오라고 한다. 도전하는 삶만이 가치 있다고 한다. 자리를 박차고 떠나라고 한다. 제 자리에 머무르는 삶은 의미 없다고 말한다. 




나를 보는 대신 ‘세상이 보는’ 것을 쫓았더니
뒤처지는 느낌에 시달리고,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고, 헛된 욕망을 좇았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남도 나를 불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를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니 타인 또한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외향적인 것이 좋다는 통념에 맞추려고 외향적인 사람인 양 행동하고 외향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겼고, 외향성이 중요한 전공, 직장을 택했다. 내가 외향적인 줄 알았다. 체형도 몰라, 스타일도 몰라, 그저 남들 입는 대로, 유행대로 입었더니 불편하고 어색할 수밖에. 




그저 맞지 않는 옷을 입었던 것이야. 옷 자체가 나쁘고 좋은 건 아니야. 옷을 갈아입고 나니 이렇게 후련하고 당당해지는 걸. 내 모습을 부정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인생이라는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배운 셈이다. 나를 나 자신으로 인정하니 어색했던 순간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다시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좀 더 생각을 정리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하면 될 일이었다. 시간을 들여 제대로 이해하고, 열심히 준비한 업무는 언제나 좋은 반응을 얻었다. 내향적인 사람은 느린 사람이 아니고, 그저 ‘이해-표현’의 선후관계가 바뀌었을 뿐이다. 


 

미지의 도전만이 값진 것은 아니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입증되지도 않은 생각을 쏟아내며 변화를 추구하듯 생각을 꼼꼼히 입증하는 내향적인 사람들 역시 꼭 필요하다. 아이 행동 하나를 보고도 두 시간 즈음 글로 써낼 줄 아는 재주를 지녔는데 당연히 변화가 많은 일보다 안정되고 변화가 적은 삶이 더 어울린다. 



겉보기에 새로운 것만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에서 ‘다름’을 발견하는 것도 도전이고, 새로움이다. ’ 도전’과 ‘모험’을 회피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패러다임을 좇을 필요가 없었다. 일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 시인의 시선이 아니던가. 걸작은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보는 것을 다르게 보는 시선에서 탄생한다. 



자주, 많이 만나는 대신 꼭 필요한 사람만 필요할 때 짧게 만나면 될 일이었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고, 용건이 분명할 때만 만나니 사람에 대한 왜곡된 시선도 생기지 않는다. 아쉬운 듯이 만나니 상대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다. 




내향성은 성향일 뿐, 좋고 나쁜 기준이 될 수 없다. 




매우 섬세하다는 특성을 겉으로 볼 때는
짜치고, 답답하고, 분위기 흐리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길 가다 돌 하나를 보고도 남다른 것을 느끼는 호기심,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통찰력,
지루하리만치 파고 들어가는 끈기, 집중력,
남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단어 하나로 10장의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 그림책 한 권을 보고 하루 종일 자신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쪼들리고' '늦된' '괴짜들'이다. 



말 못 하고 느리고 쪼들린 게 아니었어.... 깊이를 키우는 것이었어… 



문제로 봤을 때는 나쁜 것, 고쳐야 할 것이었는데 ‘특성’으로 이해하니 강화하고 보존해야 할 것이 된다. 








그래. 좋다. 내향성에도 장점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많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목소리 작고 느린 사람들이 이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티고 살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 



짐 콜린스는 



미국의 11대 최우수 기업을 이끄는 CEO들이 하나같이 동료들로부터
‘겸손하고’, ‘젠체하지 않고’, ‘차분히 말하고’,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 말한다. 




수전 케인은 



가장 효율적인 리더는 행사를 지휘하고 싶고
주목받고 싶은 욕망에 따라 동기가 자극되는 그런 리더가 아니에요.
아이디어를 내거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
집단의 상황을 개선시키고픈 욕망에 따라 동기부여가 되는 리더예요



라고 말한다. 



직관적이고, 저돌적이고,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친화력 강한 사람들 역시 사회에 필요하다. 이들이 조직에 활기와 흥겨움을 선사한다. 새로운 탐험을 가능케 하는 것도 이런 사람들이다. 내면적인 사람이 자칫하면 자기 세상에 빠져 그렇지 않았다면 보지 못할 세상을 경험하게 해 준다. 



하지만 뒤에서 빈틈을 메워주는 사람, 규모보다 실속을 추구하는 사람, 다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숙고하고 사색하는 사람이 없다면 위대한 기업, 알찬 기업, 비전 있는 기업은 불가능하다. 







십자가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서로를 지지하며 완벽한 균형과 미학을 보여준다. 이처럼 외향성과 내향성은 두 축이 서로 지탱하고 보완할 때 세상도, 업무도, 인간 관계도 완벽해진다. 수직선이 수평선이 될 필요가 없다. 수평선도 수직선이 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의 본모습으로 존재할 때 가장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에 주목할 때가 왔다. 외향성의 이상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사고를 멈추게 한다. 늦된 아이들의 무한한 발전을 가로막는다. 깊이 파는 천재들에게 "왜 새로운 도전을 안 하느냐" 라거나 “사회성이 떨어진다”거나 "두려움이 많아 큰일"이라고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자. 



"느려 터지고, 게으르고, 멍청하고, 답답한" 내 모습이 너무 싫어서, 내 과거가 보잘것없어서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내 소망을 자녀에게 투영한 것은 아닌지. 과연 나를 나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게 했던, 나를 실패하게 했던 인생 프레임을 자식에게도 씌우는 건 아닌지. 



흩어진 인생의 퍼즐이 차곡차곡 맞춰지는 느낌이다. 남의 시선에 따라 살던 시간들, 나를 버리고 외면하던 시간들, 인생의 대부분을 불편하고, 어색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고, 과소평가하며 살았다. 내가 인생에서 기쁨의 순간으로 꼽는 순간들은 모두 ‘충분히 생각하고’ ‘상대를 진지하게 대하고’ ‘성실하고 양심적이고’ ‘홀로 깊이 몰두했을 때’이다. 



유대인인은 한국인을 강점을 발현하기도 어려운데 약점을 고치는데 에너지를 낭비하는 민족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강점을 극대화시키면 누구나 빛나는 삶을 살아가지만 약점을 보완하는 데 급급하면 불편하고, 과소평가되고, 즐겁지 않고, 성취도 낮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느려 터지고 게으른" 굴레를 씌어버리면 한없이 답답하고 바보스러운 사람이 되지만 내향성의 관점에서 보면 "사색적이고, 진지하고, 깊이 있는" 사람이다. "느려 터진" 사람은 설 곳이 없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그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소중한 자원이다. 



나를 나 자신으로 받아들이자 남의 시선의 노예에서 힘과 개성이 넘치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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