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Peking laundry - Don't turn away
출근을 준비하며 오늘의 날씨에 맞는 옷을 고르기 위해 자연스럽게 날씨 어플을 켰다. 구름 모양의 아이콘이 화면에 나타났다. 강수량이 60% 정도인 걸 보아 비가 올지도 모를 것 같은 날씨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어보니 이미 비가 온 듯 공기 중에 축축한 기운이 남아있었지만 비는 그쳐 있었다. 아직 바닥에 고여있을 빗물을 대비해 밑단이 짧은 바지를 입고 우산 없이 가볍게 집을 나섰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 5분 정도 걷기 시작했을 때 한 두 방울씩 빗물이 날리는 느낌이 든다. 이런, 비가 다 지나간 게 아니었나.
그래도 서둘러 지하철 역까지만 도착하면 회사에 도착할 때까진 그치겠지.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빨라지는 발걸음에 맞추는 것 마냥 비가 내리는 속도도 빨라졌고 이내 후두둑 비가 쏟아졌다.
역까지는 겨우 5분 정도가 남았지만 이대로 더 걷다가는 출근도 전에 비를 쫄딱 맞을 판이다. 결국 세탁소 앞에 멈춰 서서 비를 피하며 택시를 불렀다. 일기 예보를 믿은 내 잘못이지, 이놈의 비는 요즘따라 왜 이렇게 오락가락 자주도 오는지. 잔뜩 짜증이 나 어디다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 요즘 비 오는 날 진짜 싫어'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린 후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엄지 손가락이 멈칫했다. 선뜻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괜히 손가락을 움찔거리다 자판을 두드려 몇 글자를 더했다.
'비 오는 날 싫다는 말, 진짜 하기 싫었는데... 요즘은 비 오는 거 좀 싫어'
'어떤 날씨 좋아해?'
어릴 때부터 그 질문에 '비 오는 날'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몸이 젖어 축축하니까, 우산을 들고 돌아다니기 불편하니까, 괜히 우울해지니까.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비 오는 날은 늘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늘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축축한 것도, 우산을 쓰는 것도, 약간 기분이 가라앉는 음울한 분위기도 좋았다. 어떤 날씨를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늘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난 비 오는 날 너무 좋아해!'
누군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우산 속으로 들어치는 빗물이나 젖는 양말, 바짓단까지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깐깐하게 말했지만, 그런 기준이라면 얼마든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습기가 섞인 축축한 비 냄새, 기분 좋게 균일한 빗소리에 묻혀 세상이 조용해지는 느낌, 작은 우산 안에 푹 숨은 듯한 기분. 이런 즐거운 것들을 위해서라면 습기를 먹어 구불거리는 곱슬머리나 빗물에 젖어서 무거워지는 바짓단, 몸이 끈적해지는 습기 따위는 용서할 수 있었으니까.
비가 내리는 날에 함께한 것들은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았다. 사람도, 시간도, 노래도 공기 중에 머금은 물방울처럼 축축하게 더 오랫동안 스며들었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온 몸으로 맞으며 함께 달리던 날, 비오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혼자 오가는 버스를 보던 날, 똑같이 생긴 우산을 쓰고 함께 길을 걷던 날.
비오는 날이면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걷다 보면, 빗속에 오랫동안 스며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배어 나오곤 했다.
나는 정말로 비 오는 날을 좋아해. 나는 그렇게 말하는 나의 모습도 좋았다. 비 오는 날은 나에게, 아주 오래되고 확고한 취향 같은 것이었으니까.
비 오는 출근길. 특히 서울의 붐비는 출근길에 비 오는 날은 단연 최악이다. 자가용을 두고 출근하는 사람이 많으니 가뜩이나 평소에도 붐비는 버스와 지하철은 더 발 디딜 틈이 없다. 축축한 우산을 들고 버스에 올라타면 이미 옷은 반쯤 젖어있고, 숨이 턱 막히는 지하철 속에서 땀을 흘리다 보면 기껏 다듬은 머리나 화장도 엉망이 된 상태로 회사에 도착한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몰골을 보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고야 만다.
아... 비 오는 날 정말 싫다.
이러다 보니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했던 것도 비 오는 날 출근할 일이 없었던 학생이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생존을 위해 일터로 향하는 직장인들에게 그 일터로 가는 시간을 더 힘들게 만드는 이 존재를 과연 좋아할 수 있는 걸까. 비를 즐길 수 있는 건 타이트한 출근 시간과 노트북을 손에 든 외근, 퇴근길 만원 버스가 없을 때나 가능한 것 아닐까. 점점 비 오는 날이 반갑지 않아 지는 것도 낭만보다 생존이 중요한 진정한 직장인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젠 누군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한 것 같은데요,
단, 아침 9시에 맞춰 출근하지 않고 노트북을 챙겨야 하는 외부 미팅이 없고 잘 차려입어야 하는 약속이 없는 날에 한해서요.라고 해야 할까. 조건 없던 애정에 자꾸 조건을 달기 시작하는 오랜 애인과의 권태기 마냥,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비 오는 날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요즘 들어 유난히 그렇듯 일기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퇴근길에도 여전히 비는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했고 지하철 역을 나오자마자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를 맞아야 했다.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속 거울을 보니 축축하게 젖은 신발과 습기를 먹어 구부러진 머리가 보인다. 목 끝까지 '비 오는 날 정말...' 하는 말이 올라왔지만 이번에도 그 말은 내뱉기 전에 다시 삼켜졌다.
따지고 보면 웃긴 일이다. 예전에야 좋아했다 해도 싫어진 것을 싫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취향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닌가. 좋아하는 날씨 하나 바뀐다고 사람의 인격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끝까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며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설레던, 그때의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이기도 하다.
여전히 비 오는 출근길은 힘들고 젖어버린 신발은 무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비록 어느 순간에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오백 가지쯤 달게 되더라도 말이다.
비 오는 날, 좋아하세요?
네, 비 오는 날 좋아해요!
노트북을 닫기 전 날씨 어플을 켜보니 내일도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네요.
내일은 출근길이 붐비기 전 조금 일찍 여유롭게 집을 나서, 이 비 오는 날을 조금이나마 더 즐겨볼까 합니다.
비가 올 때 가장 즐겨 듣는 노래 중 하나인, 소울메이트의 OST로도 유명한 Don't turn away - peking laundry를 들으면서요.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는 수플레 독자 분이라면 내일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 이 곡을 추천드려요.
봄비가 내리는 날, 출근길 우산 속에서 듣기에 아마 딱 어울리는 선곡이 될 거예요.
https://www.youtube.com/watch?v=FK4LVDHSPGk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