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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Jun 16. 2021

비가 와야지만 드러나는 것들.

Ep.65 장범준 - 추적이는 여름 비가 되어


이 글은 약 일주일 전, 비가 내리는 날에 떠오른 잔상과 생각들을 모아 미리 써둔 글이다. 수플레를 발행하는 오늘, 비가 조금 내리면 조금 더 독자들의 마음에 내 문장들이 다가갔을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날이 맑다고 한다. 생애 비를 기다리는 날이 다 있다니, 또 한 번 놀란다.

비가 와야지 드러나는 것들에 대하여, 비가 오진 않으나 그날의 생각을 적어 발행 버튼을 꾹 눌러본다.




며칠 사이 비가 꾸준히 내렸다. 봄비라 하긴 조금 늦은 비 같지만, 땅에서 자라나는 식물들은 그 빗물을 꽤나 반겼던 것 같다. 매일 출퇴근길 가로지르는 작은 공원의 풀잎들은 비가 오고 난 뒤, 유난히 초록빛이 돌았다. 누가 봐도 짙어진 초록빛을 보며 여름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공원을 지나 이내 아스팔트 도로로 향한다.


비가 오면 유난히 인도와 차도를 덮은 보도블록에 시선이 간다. 아무래도 우산을 쓰고 걷다 보니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하게 돼 더욱 그렇다. 살펴보면 비가 오는 날엔 도로의 굴곡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맑은  균일해 보였던 공간이지만 작은 균열과 굴곡 사이로 물이 담기며, 지면의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횡단보도, 카페  인도, 공원에 설치된 벤치 앞에도 크고 작은 굴곡들에 빗물이 담긴다. 사람들은 혹여나 웅덩이에 발이 빠질까 봐 조심조심 웅덩이를 피해 걸어 다닌다. 맑은 날과 달리 발걸음이 느려지고 온 집중을 땅에 쏟는다. 평상시엔 아무 생각 없이 딛었던 땅이 비가 오면 피해서 걷게 된다.


문득 인간사 매한가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기쁠 때 드러나지 않던 상처와 굴곡은, 흐려지고 어두운 상황과 맞닥뜨리면 가감없이 드러난다. 비 내리는 날이 도로의 굴곡을 찾아주듯, 어두운 상황은 본인만의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날은 아닐까. 좋은 일만 일어날 수 없으니, 가끔 어렵고 힘든 상황을 통해 심연을 다시 들여다보라는 하늘의 이야기. 평소 잘 딛고 다닌 공간도 상황에 따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문제없을 거라 여겼던 공간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하늘의 이야기라 느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렵고 힘든 시기도 꽤 버틸 수 있는 날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V47v-AXQBSw

장범준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주려했던 곡인데 그만, 비스포크 광고 음원으로 제출한 곡이라고. (자본주의 다됐네 장범준!)
안녕이라 그 말은 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시 만날테니 그냥 웃으며 걸어가요
그만하자 그 말도 하지 말구요
언젠가 다시 만날텐데 그냥 웃으며 걸어봐요
넌 어떤 맘으로 또 생각에 잠겨
이 길을 걷나요
니가 원한다면 흐린 날에 비가 될래요



개인적으로도 인간관계에서 오랜만에 굴곡과 마주했다. 잘 지낼 수 없는 사이가 됐는데, 그전까지 인간관계는 모두 즐거운 일들만 있었던 터라 작은 굴곡에도 나름 힘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이내 다시 평안을 찾은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저  마음속에 비 오는 날이 하루 찾아왔을 뿐이고, 맑은  찾기 힘들었던 마음  굴곡 하나를 발견했을 . 그리고 그 빗물 담긴 굴곡을 열심히 메웠다. 다음 비 오는 날엔 물이 고이지 않도록 묵묵히 메웠다. 그리고 티가 나지 않을만큼 편평한 땅이 돼 있었다.


맑은 날, 오롯이 기쁨을 맞이하고,

흐린 날, 굴곡을 깨닫고 열심히 메우고.


인생을 설명하는 많은 문장들이 세상에 있겠지만, 근래의 나에겐 이 두 과정의 반복으로 인생은 명쾌하게 설명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관계, 회사에서 직장 상사의 잔소리,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 숙제 등, 나의 굴곡들은 갑자기 튀어나온다. 특히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주변 상황마저 도와주지 않는다면 버거움은 배가 된다. 비 오는 날, 더욱 도드라진 흉터들과 마주하는 힘겨운 나날이 분명 있다.


그럴 때일수록 독서든, 산책이든 가벼운 운동 등으로 잡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맑아진 날이 반겨줄 것이다. 흐린 날 다음은 맑은 날이 자연의 순리이듯, 묵묵히 시간을 견뎌내면 해가 뜬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잠시 잊을 뿐. 빗물로 고인 웅덩이들을 보며 잊고 있던 사실과 작은 위로를 받는다. 이내 펼쳐진 우산을 접고 건물로 들어선다.


비가 와야지만 드러나는 흉터들에 지나치게 스며들지 말고, 툭툭 털며 묵묵하게 걸어 나가길. 내일은 맑을테니.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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