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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런 Aug 21. 2020

태도에 관하여

새똥을 맞으며 일방통행을 생각하다


새벽까지 비가 왔었나 보다.

사위는 안개로 채워졌고 가로수 잎사귀에 맺혔던 빗방울이 가끔씩 토독 떨어졌다.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나오는 햇살이 조명 효과를 톡톡히 하면서 신비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나무 터널 저 끝에 닿으면 환상의 세계로 통하는 관문을 통과할 것만 같았다.


 이 정도면 엘프들이 나타나 줘야 하는데 인기척이 없으니 나라도 엘프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혼자 키득이며 걸어갔다. 뾰족한 귀, 긴 생머리, 늘씬한 8등신 미체로 변신- 스트랩 샌들 신고, 활을 어깨에 맨 채 나무 사이를 유연하게 날아다녀야지. 그러다 힘들면 참이슬 말고 이런 나뭇잎에 맺힌 이슬로 목을 축여야지~ 북 치고 장구치고 있을 때쯤 투둑- 질퍽한 충돌이 느껴졌다.




사달이 난 곳은 왼쪽  어깨 아래. 흰 점액이 타원형을 그리며 방긋 웃고 있다. 나무 위를 살펴봐도 새는 보이지 않는다. 너 비둘기 냐? 까치 꺼냐? 소속을 물어도 웃기만 한다.

나무 아래 새똥 자국이 누적되어있는 곳은 둘러 피하곤 했는데 세찬 비로 자국들이 씻겨 내려간 모양이었다. 무방비로 새의 선물을 받고 보니 썩 유쾌하진 않았다. 이제 막 엘프로 변신했는데 똥개 같은 새가 현타를 날리니 깨기 싫은 꿈에서 억지로 나온 느낌이다.


더러운 것을 차치하더라도 새똥은 산성이라 차가 부식되니 되도록 빨리 세차를 해야 한다던 것이 생각났다. 섬유에도 딱히 좋을 것은 없으므로 집으로 바로 돌아가 세탁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세탁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서서히 더워질 시간. 굳이 그때를 말할 필요도 없이 지금 현재 해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안개 낀 신비로운 분위기는 금세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놓치기가 대단히 아쉬운 시점이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는 잃는 법.  

몇 분 더 묻혀간다고 구멍이라도 나겠나..

이왕 엘프 놀이하는 김에 너도 자연, 나도 자연, 자연끼리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뭐, 껄껄껄-

나는 에고와 극적인 타결을 본 뒤, 신기루를 얻고 청결함을 잃었다.

그렇다고 점점 퍼질 물질을 그대로 둘 순 없었다. 점액량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나뭇잎을 주워 들어 쓸어 담듯 닦아냈다. 임시방편이긴 해도 조금 나은 것도 같다.




싱싱한 신록을 발산하던 고운 잎이었는데 이물을 묻히고 나니 에구.. 탄식이 나왔다. 얼떨결에 봉변을 당한 잎에게는 미안함과 감사를 표했다.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자 기어이 사족을 덧붙여 속삭인 후 날려 보냈다. 새똥 맞으면 행운이 온대~~


뱉어놓고 보니 나도 참 표현이 박약하다 싶다.

사람한테야 근거 없이 막무가내로 주술적인 문장이 귀여운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나뭇잎에게 새똥을 맞으면 행운이 온다니...  곤충과 새의 분비물을 온몸으로 묻혀내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나뭇잎에게 뭐 그리 희귀한 일이라고 행운씩이나 기원을 했나. 부지불식간에 이물질이 툭툭 떨어지는 상황이 아무리 이골이 났다 해도 그게 매번 좋을 리가 있겠나..  

게다가 희생시켜 미안했으면 그냥 미안한 걸로 참회하고 끝내지, '내가 너한테 한 일이 마냥 안 좋은 것만은 아니야, 좋을 수도 있어' 하는 식의 가증스러운 변명을 늘어놓는 갑질까지 얹었으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까짓 나뭇잎 하나 가지고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와 다른 상대를 내 식대로 추정하고 합리화하는 일방통행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나온다는 것이 부끄럽다. 뭐든 입장 차이란 것이 있기 마련일 텐데 다 알 순 없어도 깨방정은 조심하는 정도의 예의는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얼룩덜룩해진 나뭇잎을 다시 보니  일그러진 마음이 느껴진다. 상처 받은 마음 앞에서는 몰라서 실수인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럴 때 모르는 것도 죄다. 경솔한 태도가 굴절시킬 수 있는 대상과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새가 똥을 날린 것도 다 혜안이 있어서였네 싶다. 너님 액면가 최소 오크~ 했던 게 아니라,  작은 잎사귀 하나와도 소통불가인 자가 자연친화적인 엘프 종족을 흉내 내는 자체가 기만임을 간파했던 거다.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맞아도 싸다,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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