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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병천 Mar 04. 2024

제3부 천년제국으로(범죄자들)(29) 끝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3 -문학동네

문학동네에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박종대 선생의 번역으로 총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완독 하고 싶은 마음에 읽고 느낀 점을 적어두려고 한다.


38. 한 위대한 사건이 태동 중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 1848년 이후에는 심지어 혁명도 수많은 말들에서 초래되었어요!”
이런 차이를 삶의 일상적 단조로움 속에서 허락된 일탈로만 간주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심중한 결과를 낳는 이런 실수는 우리가 ‘그건 감정 문제야!’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흔하게 벌어진다. 사실 이 문장이 없으면 우리 정신도 제대로 갖춰질 수가 없다. 필수 불가결한 이 문장은 삶에 있어야 할 것과 있을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 울리히가 아가테에게 말했다. “그 문장은 정해진 질서를 개인에게 허락된 여자와 구분해. 합리화된 것과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구분하기도 하고. 그 문장은 일상적으로 사용될 경우 다음의 고백과 같아. 즉 인간성은 주요하게는 강요이고, 부차적으로는 수상쩍은 독단이라는 거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 우리에게 포도주와 물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혹은 무신론자와 경건한 신자 중에서 무엇이 되고자 하는지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삶은 감옥일 거라고. 하지만 감정 문제에서 우리가 실제적인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아. 오히려 허락되거나 허락되지 않은 감정 문제 사이에 모호한 경계선만 있을 뿐이지.”
-571~572


'감정'이란 것에 주목한 시기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믿어왔고, 의지에 의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의지가 약한 것처럼 느끼곤 했다. 살면서 이성이 감정에 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애써 부정하며 감추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감정 문제를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적용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완벽하게 이성적인 인간이라던가 완벽하게 감정적인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양가감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의 결심이 한순간의 감정으로 무너져 내린 적이 있다면 감정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도덕은 한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행동 조절이야. 특히 내면의 동력 그러니까 감정과 사고의 조절이지.”
-573


모든 인간이 자신의 감정대로만 행동한다면 사회는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법과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전에 우리에겐 내면화된 도덕이라는 동력이 존재한다.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수없이 고민하는 것은 도덕이라는 잣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도 다른 모든 질서와 마찬가지로 강제와 폭력을 통해 생겨난다는 거야! 그러니까 권력을 잡은 무리들이 자신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규범과 원칙을 부과하는 거지. 동시에 그 무리도 자신들을 위대하게 만들어준 규범과 원칙에 묶이고. 그러면서 모범으로 작용하기도 하지. 동시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바뀌기도 해. 이런 일련의 과정은 당연히 이렇게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 그리고 그 과정은 지적 능력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그런 지적 능력이 아닌 실행을 통해 결국엔 신이 만든 하늘처럼 만물 위에 독립적으로 팽팽하게 펼쳐진 무한한 그물망이 생겨나. 이제 모든 것이 이 망과 연결돼. 하지만 그물망 자체는 어떤 것과도 관련이 없어. 달리 표현하자면 모든 것이 도덕적이지만, 도덕 자체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는 거지!......”
-573


도덕이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시대마다 문화와 가치관이 달랐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도덕의 모습도 달라졌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도덕적이라는 기준보다 선하게 살려는 인간의 마음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도 무언가를 먹어야 살 수 있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부터 여기까지 왔다. 그런 생존에 대한 욕망이 유전자 깊숙이 새겨져 있기라도 한 듯 이타적인 삶은 쉽지 않아 보인다. 선하게 살고 싶지만, 선하게 살 수 없다는 식이다.


“수백 년 전부터 세계는 사고 속에 진리가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사리에 맞게 일정 수준까지 사고의 자유를 인정해 왔어. 하지만 그 시기 동안 감정은 진리의 엄격한 훈련을 받지 못했고, 활동의 자유도 얻지 못했어. 왜냐하면 그간 모든 도덕이 임의의 행위에 필요한 정도로만 특정 원칙과 기본 감정들을 허용하면서, 그것도 아주 경직된 방식으로 그 감정들을 통제해 왔기 때문이지. 나머지 감정은 사적인 변덕과 개인적인 감정 유희. 예술 분야에서의 이런저런 노력, 학술적인 논쟁에 맡겨버렸어. 이처럼 도덕은 감정을 자신의 필요에 적응시켰고, 그 자체가 감정에 좌우되는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발전시키는 일을 등한시했어. 사실 도덕은 감정의 질서이자 통일체거든.”
-578~579


소설의 종반부에 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깊이 있게 다뤄지고 있다. 감정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덕이 감정의 질서이자 통일체라는 문장이 무척 와닿는다. 감정이란 단어를 들으면 질서라는 단어가 함께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보통 우리는 도덕을 삶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의 법규 정도로 이해한다. 그런데 삶은 결코 이를 준수하지 않기에 그 법규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는, 그래서 빈약하게나마 이상적인 외관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을 그 단계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도덕은 판타지다. 그가 아가테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알려주고 싶었던 두 번째는, 판타지란 마음대로 움직이는 독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판타지를 독단에 맡기면 복수를 당하기 마련이다.
-580


감정과 질서 사이에 도덕이란 기준을 가져다 놓는다. 아마 이 말은 균형이란 단어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적당히'라는 부사에 밸런스를 유지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80퍼센트 정도의 안락과 20퍼센트 정도의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어떨까?


그 뒤에야 울리히는 아가테가 갑자기 작별인사를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의 결심으로 오빠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600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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