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없는 남자> 로베르트 무질 지음, 박종대 번역 (문학동네)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이 독일어로 쓴 <특성 없는 남자>를 전문 번역가 박종대 선생이 무려 10년 동안 작업해서 완역을 했다. 문학동네에서 3권에 나누어 출간되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번역할 결심을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심을 하고도 좌절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도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에는 무구한 인내가 필요하다. 인생에서 자신이 정한 것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때론 예기치 못한 시련이 삶을 압박하기도 한다. 그 압박에 눌려 무너지는 삶도 있고, 잔디처럼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삶도 있다. 평생 남 탓만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염증이 느껴질 때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지게 다가온다.
책을 읽는 내내 많은 생각이 찾아들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 느끼는 좌절은 뒤로하고 울리히뿐 아니라 등장인물이 가진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얼마나 많은 사유를 하면 그토록 다양한 관점을 그토록 냉철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상대의 생각을 쉽게 생각하고 자신의 배경지식 안에서 상황을 해석하려는 사람을 염증이 날 정도로 많이 봐왔다. 나 역시 그 범주 안에 있는 인간 중 하나일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 울리히를 보면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떠올려보면 바로 가능성에 관한 사유일 것이다. 흔히 '그럴 수 있죠.'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논리적으로 펼친다. 그 또한 모순 속에 자리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르지만, 상대의 가치관의 오류를 적나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 단 한 번도 '내로남불'의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그 주장 속에 논리적인 오류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라면 흑백논리처럼 단순화할 수도 있지만, 울리히의 관점은 흑백논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깊은 사유 속에 상대의 주장에 배려와 반론이 담겨있는 느낌이다. 스스로 그 중간 지점에 자신이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도 엿보인다. 현대를 살아갈 때 피곤한 유형의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울리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평생 동안 공부하고 고민하더라도 이 책 안의 사유를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투적이지 않은 표현언어 속에서 무수히 많은 비유와 상징들.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표현하는 놀라운 관점에서 소설의 정수를 느꼈다. 등장인물 중 나는 어떤 사람과 비슷할까? 저런 질문을 받으면 난 뭐라고 답변을 했을까? 스쳐 지나가는 상황에서도 저렇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경솔한 표현을 하지 않고 내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 내 이야기가 상대에게 과연 얼마나 전달이 될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완독을 하고 리뷰를 마치는 동안 계속되었다.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지구의 나이는 약 43억 년이다. 얼마나 기나긴 시간인지 쉽게 상상하지 못할 수 있다.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탈레스조차 채 3천 년이 되지 않았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스치는 바람처럼 찰나일 수도 있는 개인의 인생에서 가능성 인간이나 깊이 있는 사유가 무슨 의미를 지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이 시대에 인간으로 태어났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이야기가 현재를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줄 거라 확신한다.
- 망원동을 잠시 떠나 고성 초도리 앞바다를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