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과거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iii Jul 22. 2018

민지와 민지, 그리고 민지


  나에게는 두 명의 민지가 있다. 새로 생긴 고등학교에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곤 겨우 네 명이 진학하면서 만나게 된 민지와 대학 졸업 후 단편 영화 촬영 현장에서 만난 민지. 



  고등학교 내내 민지와 등하굣길을 같이 했다. 신도시에 갓 지어진 고등학교는 공사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교통편이 영 불편했다. 아버지들은 교대로 딸들의 등하굣길을 책임졌다. 아침에는 민지 아버지의 차에 모였고 야간 자율 학습시간이 끝난 후에는 우리 아빠나 혹은 다른 친구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민지와는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영어 선생님의 험담으로 점점 친해진 민지와 나는 영어 선생님이 얼마나 싫었는지 영어 과외를 같이 하기도 했다. 미대로 진학을 준비하던 나는 동료를 찾아다녔고 내 레이더망에 포착된 이는 민지였다. 대학교 진학 후,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붙어 다니던 친구에게 안녕을 고했다. 눈에 띄게 그녀가 나의 세계에서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애로 충만하고 이기적이었기에 가능한 선언이었다. 당시 나는 친구라면 같은 세계에 몸을 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 비춰본다면 민지는 내가 아는 세계에 대체로 머물러 주었다. 가끔 민지를 만나면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내가 아는 세계에 있을 것이라고 근거 없이 믿었다.  


   민지는 단편 영화 촬영 현장에서 만났다. 그때의 나는 한 편의 영화 현장을 경험하고 약 일 년의 은둔생활을 마친 후였다. 다시 한번 힘을 내보겠다고 기합이 대단히 들어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중 민지는 유일하게 동갑이었고 혼자 담당하는 일이 영 버거웠던 나는 힘듦을 토로할 대상이 필요했다. 민지가 사운드라는 나와는 다른 접합 지점, 부딪칠만한 구석이 없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친구로 이어지는 것에 한몫했을 것이다. 영화 촬영이 끝나고 민지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 이외의 공간에서 친구를 사귀려고 시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요령을 모르는 나는 관심을 표하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치킨뱅이로 시작한 관계는 일본식 선술집으로 이어졌다. 


  민지와 민지가 서로를 만난 적은 없다. 그저 민지들은 나에게 또 다른 민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번 자리를 만들어보겠다던 나는 게을렀고 세 명 이상의 사적인 만남을 불편해하던 터라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민지들은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쳤다. 민지들이 서로를 마주하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들이 서로 마주친 것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다. 다만 추후, 각각을 통해 어떤 인상이었다 라는 이야기를 듣곤 흥미로웠다는 감상만이 남아있다. 나는 민지를 붙잡고 나의 혼란을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최근에 또 다른 민지가 떠올랐다. 무려 초등학교 삼 학년 때 통통한 손으로 크레파스를 쥐고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깜박이던 민지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대화를 하다 갑자기 또 다른 민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치 물에 잠겨있던 시체가 떠오르듯이. 초등학교 이후로 민지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민지는 어릴 적 나에게 질투의 대상이었고, 질투를 숨길 줄 몰랐던 나는 어김없이 질투의 기운을 뻗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를 눈치챈 당시 좋아하던 남자아이가 나의 질투를 재료 삼아 놀렸던 것이 기억난다. 유난히 선생님의 마음을 독차지해야 하는 성향이 강했던 나는 그 무렵 선생님의 마음에서 그림으로 나의 정체성을 옮겼다. 내가 가장 잘 그려야 했다. 나를 쳐다보던 검은 눈동자의 민지가 떠오른다. 나에게 아무 감정도 갖지 않았던 눈망울. 졌다. 민지는 이후로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 시체처럼 잠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름의 그들이지만 민지를 부를 때와 민지를 부를 때, 그리고 민지를 생각할 때 나의 입은 그들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안다. 눈(eyes)과 눈(snow)처럼, 혹은 문(moon)과 문(door)처럼. 민지에서 시작한 글은 민지들 곁에서 시간을 보낸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민지에서 민지로 이어지는 나의 시간은 또 어떤 민지를 만나게 될까. 민지와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까. 




* 표지 이미지 : <우리들(THE WORLD OF US)>, 윤가은, 201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