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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Aug 09. 2018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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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줍는 사람들

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 


  야네스 바르다의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로 시작한다. 수확이 끝난 후, 여인들이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줍는다. 전통적인 행위로써의 '줍는' 행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유통의 궤도에서 벗어나 버려지는 음식들을 주워 먹고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제 막 마감한 시장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 허리를 숙여 먹기 적당한 채소나 과일 등을 줍는다. 시장을 배회하는 사람들의 클립을 '줍는다고 구걸은 아냐.'라는 랩의 가사와 경쾌한 리듬으로 이어놓았지만 곧 '그래도 보면 가슴이 아파.'라고 노래한다. 


  그녀의 필름을 보다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생각났다. 극 중, 케이티가 보호 급식소에서 필요한 물품을 상자에 담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때문이다. 그녀는 두 아이를 돌보기 위해 런던 노숙자 보호소에서 지내다 집을 얻어 지방으로 내려왔다.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던 그녀는 이내 눈물을 쏟아낸다. 식료품을 지원하는 곳에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통조림 캔을 뜯어먹다가 눈치를 본다. '내 꼴 좀 봐요.'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고 한심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2016


  부랑자들이 마감한 시장 골목에서 주워 먹을 것을 찾아 허리를 숙이는 장면과 케이티가 차마 생리대나 면도기 등의 여성 필수품을 식량 지원소에서 얻지 못해 훔치는 장면이 겹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은 일의 대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에 도달하지 못한다. 반려자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병든 노인과 두 아이의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한 여자, 유색인종 혹은 이민자라는 위치는 주류의 사회로 편입되기 녹록지 않다. 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삶을 꾸린다. 옆 집 청년은 중국에서 가짜 신발을 사들여 팔고, 저녁을 사과로 버티던 케이티는 딸, 데이지가 헌 신발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몸을 팔기 시작한다. 도움을 주겠다고 만들어진 일종의 복지 정책이나 사회적 제도는 그들을 모른 척한다. 사회는 제도를 밟아가는 절차 과정에서 수치심을 제공하거나 그들의 처지는 그들의 탓임을 넌지시 내비칠 뿐이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Gleaners and I)>, 야네스 바르다, 2000  /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2016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 다니엘 블레이크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Gleaners and I)>, 야네스 바르다, 2000

  바르다가 일련의 줍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만들어나가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나'는 야네스 바르다다. 그녀는 이삭을 줍는 사람처럼 포즈를 취하다가 곧, 카메라를 든다. 그녀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한다. 하지만, 그녀의 카메라는 대상을 재단하지 않는다. 바르다는 대상과 병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줍는 사람'이라는 대상을 이미지나 '인상을 줍는' 자신에게로 내재시킨다. 감정이입이나 동정을 하는 등의 가치판단은 그녀의 몫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삶에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아내거나 그들의 부분을 자신이 가진 다른 부분에 대입시켜본다. 종종 줍는 자들의 틈바구니에서 하트 모양의 감자를 찾아내기도 하고 이동하며 만난 고속도로의 트럭을 손으로 잡는 놀이를 하는 등, 자신의 인장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우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것을 엮는다. 


  버려진 감자는 음식물을 주워가는 사람들에서 채집자로서의 요리사, 수집가로서의 창작자로 옮겨간다. 층위를 확장시켜 나가는 이야기 방식은 '줍는다'라는 행위를 모두 동등하게 만든다. <방랑자>에서 모나는 방랑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임을 말한다. 누군가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겨 쥐어주는 돈이나 음식도 아랑곳하지 않고 받는다. 그녀는 벌지 않고 주워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그녀의 주체성이라고 느낀다. 바르다는 그들이 가진 우울도 일종의 궤도를 벗어난 주체성으로 터치해나간다. 그래서 그들은 때때로 참담하지만, 때때로 즐겁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다.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연거푸 강조해 적어보는 '나'.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정작 자신의 상태를 심사한 당사자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 그저 전화와 서류의 절차로 계속 맴돌기만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디지털 형식으로 바뀐 절차에 대해 지나가는 젊은이, 혹은 기관의 사람을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그는 주저 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같은 처지의 케이티에게 '네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그녀가 자존감을 팔지 않기를, 자존심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를 위해 도울 수 있는 것들을 한다. 데이지와 딜런에게 좋은 어른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고 집을 수리하거나 전기세를 대신 내어주기도 한다. 서서히 추락하는 인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창에서 다른 이와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받으려 했던 다니엘의 애씀에도 사회는 여전히 그에게 '실업 수당'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말을 시키거나 그의 노력을 묵살시키며 수치심만을 제공한다. 그는 더 이상 그의 자존심까지 팔고 싶지는 않다. 가구를 다 팔지언정 모빌은 팔 수 없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 자존심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단단한 벽 위에 '나'라는 단어에 한없이 부족한 삶을 그는 크게 적어본다. 



이삭 줍는 사람들              

       나         ,            

다니엘 블레이크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의 말미에는 프랑스어 교육이 필요한 이민자들에게 교육 자원활동을 하는 부랑자가 등장한다. 그는 시장을 전전하며 채소와 버린 빵을 주워 먹으며 끼니를 채우고 지하철 역 앞에서 팸플릿을 팔며 약간의 돈을 번다. 다니엘은 자신의 방을 갖게 된 데이지에게 직접 만든 모빌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의 호의는 다른 이의 넓어진 아량으로 되돌아온다. 데이지는 아픈 다니엘의 집을 찾아가 차마 문을 열지 못하는 그의 앞에서 도울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결국 너와 나를 잇는 '과'와 '쉼표'는 다니엘의 모빌로, 웃으며 언어를 제공하는 야간 교육활동으로 생성된다. 자존심을 택하면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다니엘은 '저도 돕고 싶어요.'라는 데이지의 말을 남겼다. 다니엘의 모빌은 데이지에게로 이어졌다. 또는 하트 모양의 감자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2016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Gleaners and I)>, 야네스 바르다, 2000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Gleaners and I)>, 야네스 바르다, 2000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켄 로치, 2016

<방랑자(Vagabond)>, 야네스 바르다,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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