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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Mar 23. 2018

타자와 함께  도달하려는 구원에 대하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이 시대에 사랑이 가능할까. 비혼의 선언과 이혼이라는 신뢰의 무너짐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금, 나는 과연 혼자로서밖에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일까. 비단 결혼이라는 제도를 차치하고 세계는 혼자 있음의 안락함과 평온함에 빠져들고 있다. 세상은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인간관계’와 ‘인맥’이라는 모종의 과목을 만들었다. 그것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혼자를 말하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은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가는데 필수요건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혼자와 개인의 삶은 자아를 커다랗게 부풀렸다. 자아라는 이름 아래 자아실현과 자존감 등의 용어는 말과 글로 이어져 우리를 휘감았고, 이내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두 자아 찾기와 자존감 수업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자신을 몰아갔다. 마치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자신을 생산하려 헛되이 노력’하는 것처럼. 그렇게 얻어낸 자아는 자신을 구원했을까. <에로스의 종말>에서 저자는 ‘타자와의 충돌, 그로 인한 자아의 공백과 무아의 상태가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의문이 든다. ‘타자 속에서 소멸하는 자아’라는, 말로만 들어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이 개념이 가능할 것인가. 과연 ‘타자를 껴안음으로 인한 구원’이 가능한가.




‘우리에게 넓은 초원도, 그녀에겐 우울한 감옥이었다.’



1.     베티와 저스틴 :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타자로서 타인을 구원하는 법 


 <베티 블루 37.2(Betty Blue 37.2)>의 베티와 <멜랑콜리아(Melancholia)>의 저스틴은 나르시시즘과 우울증이 뒤섞인 존재이다. 베티는 자신의 심기가 벗어난 상황에 폭력적으로 대처하며, 저스틴은 가장 좋아하는 미트로브의 맛도 느끼지 못할 만큼 늪에 빠져있다. 하지만 그들의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은 '생존에 대한 염려'가 아닌 '좋은 삶'을 위한 곱씹음에 의해 나타나는 징후이다.


  그들에게 온 세상은 ‘벌거벗은 삶’이다. 베티는 조르그의 집과 일자리를 위협하며, 터무니없는 노동으로 그들을 옥죄여 오는 사장에게 페인트를 던진다. 더 나아가 조르그를 노예로 전락하게 만드는 집을 불태운다. 영화에서 조르그와 베티가 안락함을 던져버리고 삶 한가운데로 달려 나갈 때마다 나오는 음악(C’est le vent, Betty)은 그들에게 구원이란 ‘벗어남’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인다. 저스틴은 결혼식에서조차 광고 문구를 뱉어놓을 것을 종용하는 상사와 18홀의 대저택에서의 결혼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형부 사이에 놓여있다. 저스틴은 끝내 클레어가 말하는 ‘좋은 끝맺음’을 져버리고 결혼을 파기한다. 베티와 저스틴은 그들을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위해 선물하는 과수원과 자연의 풍경에조차 붙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목가적 풍경과 과수원으로 대변되는 일종의 삶의 낭만성을 의자에 미뤄둘 뿐이다.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베티와 저스틴은 행방을 달리한다. 베티는 나르시시즘에 이어 자기파괴의 늪으로 발을 디딘다. 위태로운 그녀를 초조하게 바라봐야만 하는 이 영화에서 베티와 조르그의 구원을 찾아내기란 힘들다. 하지만 그들의 폭풍과도 같은 삶이 경이로운 이유는 현실 속에서 지극히도 현실적인 타자성을 사랑한 이들의 실패담이기 때문이다. 비교 가능하던 이들이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서로가 되었을 때의 환희와 절망을 오롯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식탁에서 조용히 글을 쓰는 조르그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조르그가 타자인 베티를 통해 얼마나의 자기 자신을 되찾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 이 서사는 조그맣게 속삭인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라고. 일정 부분 그러하다고.


  한편, 저스틴은 멜랑콜리아라는 죽음의 시간을 마주하며 타자를 받아들인다. 이제, 그녀는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클레어 앞에 타자로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18홀의 대저택을 강조했던 클레어와 형부의 공간에는 19홀이 존재한다. 대저택의 안주인으로 저택과 결혼식을 총괄하고 관리해 온 클레어도 알지 못하는 19홀의 공간은 그녀가 자각하지 못한 타자의 공간이다. 이 아토포스적(무소적) 타자의 공간에서 그녀는 그의 아들을 데리고 벗어나려 한다. 그녀에게 통제 불가능한 미지의 19홀과 멜랑콜리아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이 두려움 앞에서 줄곧 저스틴을 보드 담아 오던 클레어는 저스틴이라는 타자에게 이끌려 그녀와 아들이 타자의 공간 속에 지은 안식처 안으로 몸을 가눈다.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
베티 블루 37.2 (Betty Blue 37.2, 1986)




‘너는 명백하게, 기가 막힐 정도로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내게 또 일깨워 줄거야.’ 



2. 그리고 루이즈 : 타자를 온전히 끌어안는 법


  <컨택트(Arrival)>의 루이즈는 외계에서 온 헵타포드와의 소통을 위해, 철저한 타자의 언어를 익혀 나간다. 그녀가 그들에게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질문과 대답이다. 이를 위한 매개체로서 언어가 선택된 것은 '언어'가 타자성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적합한 도구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사용하는 언어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바꾼다.'라는 가설처럼, 그녀는 사고방식의 변화와 더불어 존재방식의 변화까지 경험한다. 이러한 절정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지의 두려움을 끌어안는다. 현재에 머무르는 존재방식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간인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그녀는 흡사 자신의 종말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타자 속에서 소멸되는 자아' 로서 언어라는 '타자의 선물'을 받은 루이즈는 세계를 구원한다. 


  루이즈는 자신 또한 구원할 수 있을까. 영화는 헵타포드라는 타자 외에 또 다른 커다란 타자를 등장시킨다. 그것은 루이즈가 볼 수 있는 원형적 시간 속의 그녀, 즉 미래의 그녀이다. 헵타포드와의 이야기와 더불어 루이즈가 가지고 있는 앞쪽 기억의 재인 딸, 한나(Hannah)와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는 방식은 헵타포드와 원형적 시간 속의 루이즈, 모두 타자라는 무대의 동일선상에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시간을 벗어난 이 타자 앞에서 그녀는 딸의 죽음과 이안과의 이별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선택의 순간, 그녀는 이안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전 생애를 다 볼 수 있다면 삶을 바꾸겠어요?' 


컨택트 (Arrival,  2016)


  루이즈는 조용히 이안을 안는다. 루이즈는 이미 알고 있는 그녀의 비극적 삶을 껴안는다. 루이즈의 삶은 어떻게 지속될까. 적어도 그녀가 타자를 끌어안음에서 얻은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 해 줄 것이라 믿는다. 원형의 언어와도 같은 대칭어 한나(Hannah)라는 이름을 딸에게 지어준 그녀는 또다시 타자를 경험하려 한다. '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도.'




 '얘기가 듣고 싶으니까'



 ‘동일자의 지옥’에서 타자를 욕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지켜지길 바라는 일상에 균열을 낼 것이다. 어떤 사건에 대해 일상생활이 가능한지를 물어보는 일련의 태도들은 우리가 가까스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고 슬프게 읊조리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나는 에로스의 종말이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쏠려 있지만. 그와 동시에 타인의 이야기에 한없이 귀 기울이려고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무수한 저자와 독자가 있는 까닭, 한없이 개인적인 원룸이라는 공간과 동시에 이토록 많은 카페가 성행하는 까닭은 다른 이와의 접촉을 놓치 않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라고. 다만, 인간관계와 사회화의 이름이 아닌 진정한 타자와의 시간에 나를 할애할 수 있기를, 우리의 관계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기를. 타자와의 만남이 뜨거워 피하고 싶을 때, 조금 더 나를 내어놓을 수 있는 조금의 용기를 갖기를 바랄 뿐이다.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2015

<멜랑콜리아(Melancolia)>, 라스 폰 트리에, 2011

<베티 블루 37.2(Betty, Blue 37.2)>, 장 자끄 베넥스, 1986

<컨택트(Arrival)>, 드니 빌 뢰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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