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어느 가족>과 소설 <여름, 스피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항상 예쁜 것을 좋아라 했다. 어렸을 적은 더욱 더. 허벅지가 두꺼운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다지 굵지 않았건만 몸에 비해 두꺼운 것이 싫었고, 다리에 털이 많은 게 싫었고, 그래서 다리를 드러낸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한결같이 검정 스타킹만을 고수했다. 그것이 내 다리털을 가려줄 것이고 두꺼운 종아리를 그나마 얇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었다.
똑똑하고 싶었다. 고등학생까지만 해도 내가 똑똑한 줄 알았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고, 선생님들도 나를 좋아했다.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은 의무였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했을 때,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 좋은 성적이 아깝다고 했다. 어디를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싫었던 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울며불며 엄마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예체능 하는 애들은 공부를 못한다.'라는 그 어이없는 문장을 깨기 위해 공부했다.
'똑똑함'이 단순히 성적의 의미, 많이 아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은 대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그림을 그리는 많은 아이들이 모였고 대부분이 예술고등학교 출신이었다. 그들은 감각적이고 똑똑했다. '공부 잘하는 그림 그리는 애'라는 정체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쌓아 올린 그들의 예술적 토양이 한없이 높아 보였다. 그 사이, 어느 곳도 제대로 끼어들지 못했다. 애매했다.
곧, 내가 얼마나 바닥을 치는 열등감과 겁을 가진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종종 나에 대한 미움은 자기 파괴의 행위로 이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겁이 많은 탓에 내가 기껏 하는 자기 파괴란 많이 먹고, 낮은 곳으로 침잠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미술을 암암리에 포기하고 나서,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놓친 세계에서 여전히 유영하는 이들을 감탄만으로 우러러보기란 힘들었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진 대신, 찾은 대체제는 책과 영화였다. 미술이 하지 않는 활자의 명확함과 이야기의 서사성은 다른 매력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각각의 아름다움으로 반짝였다. 표현하는 재료가 달라져도 여전히 똑똑한 것은 똑똑해 감탄을 자아냈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 울게 만들었다. 내가 눈감아 버린 세계는 여전히 뒷면 어딘가에 존재했다.
창작자는 각자의 아름다움을 찾는 여정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아름다움을 정성껏 꾸려다 살포시 풀어놓는다. 그 정성스러운 선물 중, 작년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이었다. 그의 영화를 주욱 봐왔지만 묵직하고 밀도 높은 이 영화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오사무와 쇼타가 혼자 있는 유리를 집으로 데려오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어느 가족'이 되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노부요와 목욕을 하던 유리는 그녀의 상처를 발견한다. 상처를 가진 이는 타인이 가진 상처에 눈길이 간다. 가만히 상처를 쓰다듬는 유리의 손길은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이 스쳐 겹쳐낼 수 있을 만큼의 위로다. 같은 처지를 공유하던 사람들의 관계는 순식간에 틀어진다. 경력자 둘 중 하나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서, 먹고사는 생존이 걸린 순간이 그렇다. 회사가 책임을 회피하며 너희들끼리 상의하라는 둘의 싸움으로 치부해버리는 순간에. 지각한 것을 봐주며 나름의 동료애를 쌓았던 둘은 일순간에 적이 되어버린다. 출근부를 대신 찍어준 고마움을 음료로 표하던 손짓은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며 찔러버리는 이기적인 음성으로 변한다. 그 말에 순순히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라고 되받아치는 노부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유리를 감싼다.
이야기는 동그랗게 마무리되지 않는다. 쇼타가 가지고 뛰어내린 오렌지가 아스팔트 위를 각기 굴러가는 것처럼. 임의의 가족으로 모였던 이들은 허름하지만 따뜻했던 공간을 뒤로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유리와 쇼타에게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 노부요와 오사무는 결국 자신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아니, 없다.'라는 것을 인지한다. 유리가 친모에게 돌아갔을 때, 노부요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낮은 한숨과 손등으로 하염없이 얼굴을 쓸어내리는 일이었으므로. 그렇게 노부요는 쇼타와의 작별을 결심한다. 컵라면과 고로케를 먹으며 겨울밤을 보낸 오사무 역시 쇼타를 떠나보낸다. 헤어지는 버스 안의 창 밖을 바라보며 '아빠'라는 입모양을 지어 보이는 쇼타에게 오사무는 목소리가 아닌 입모양으로 존재한다.
목소리로, 의미와 발화를 담은 관계가 아닌, 입모양으로 존재하는 관계를 그린 감독은 그의 영화 자서전에 "'대상에 대한 사랑과 깊은 관심'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시간'이라는 두 가지를 전제로 "취재를 통해 찍는 쪽에서 일어난 번혁까지 포함하여 작품화하는 것"이라는 오기마 나기사의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 인용을 고스란히 그의 영화에서 보여준다. 그가 얼마나의 관심으로 그 시간을 계속 지속시키는지, 영화는 답한다. 그가 <아무도 모른다>를 촬영하며 적은 글은 여전히 빛나도록 아름답다. 마치 발언되지 않고 명명되지 않은 풍경에 계속 천착할 것을 다짐하는 것처럼.
「방치된 6개월 동안 그들이 본 풍경은 잿빛 '지옥'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들 생활에는 물질적 풍요와는 다른 어떤 '풍요로움'이 존재했을 테고, 남매들 사이의 감정 공유가, 기쁨과 슬픔이,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성장과 희망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아파트 밖에서 '지옥'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전기가 끊어진 아파트 안에서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험했을 '풍요로움'을,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상실되었는지를 상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작년 여름이었다. 계절과 어울리는 제목을 가진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를 읽었다. 특히 첫 장에 실린 단편 <컬리지 포크>의 책장을 넘기며 손끝이 떨렸다. 이유모를 떨림은 해가 지나고 나서야 명확해졌다. '은유'라는 아름다움과 직접적이고 가감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과정,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을 택하는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l 비겁하고 아름답고 풍부했다.
주인공은 바르트의 텍스트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에하라 교수와 '나'는 바르트의 텍스트를 가운데 두고 숨김과 은유, 막과 레이어, 그리고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에 못지않게 드러내 달라고, 천박해달라고 외친다. 에하라 교수와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나'는 에하라 교수를 바르트에 대입시키기 시작한다. 에하라 교수의 책 위로 가후와 바르트의 책을 포갠 행위처럼. 에하라 교수는 이제 바르트의 텍스트와 같은 거대한 은유의 막으로 존재한다. '나'는 그 미묘한 관계 사이에서의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 하지만 바르트에게 외쳤던 것처럼, '나'의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에하라 교수는 과연 '나'에게 은유였을까? 은유의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 이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나'와 에하라 교수와의 관계는 어느 날 교수 연구실 문에 붙어있던 그의 성적 정체성과 취향을 폭로하는 글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량의 우위를 점한다. 자신의 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새근히 잠든 에하라 교수를 바라보며, 주인공은 '안온'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와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나'는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비겁함인지, 기만인지, 사려인지 골몰하기 시작한다. '나'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일컬어 '비겁하고 아름답고 풍부했다.'라고 일컬었던 것처럼, '나'는 비겁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그의 의문은 일본에서의 여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과제 제출을 위한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풀린다. 그들만큼 아름답고 싶었지만, 드러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고. 무언의 안온함을 견딜 수 없었다고, '나'는 은유의 막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 숨김의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은폐는 나의 계획이자 무기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 '나'의 텍스트는 '~일 것이다.'라는 자기 암시적 고백으로 이어진다. 일관된 어미로 끝나는 문장의 나열은 현재의 내가 과거를 돌이켜 다시 미래로 불러일으키는 행위의 증거다. 결국 글쓰기의 찬미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쓰기라는 '정지'버튼을 누른다. 비로소, '나'의 여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나'의 여름을 되찾는다. '그와 함께했던 봄과 여름이 쏟아져들어왔다.'는 고백처럼.
- 나는 모르겠다.
- 나는 알고 싶다.
바스 얀 아더의 작업은 제목과 정확히 일치한다. <Fall>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자신과 매달려 있던 나무에서 떨어지는 행위를 영상으로 담은 작업이다. <I'm too sad to tell you.>는 하염없이 울며 말을 잇지 못하는 자신을 담았다. <Fall>과 <I'm too sad to tell you>라는 의미만으로 이루어진 일상어는 아이러니하게도 툭하고 떨어지는 모양새, 말 못 할 정도로 우는 행위와 시간에 기대어 오로지 그의 것이 된다. 그는 'fall'이라는 단어와 'I'm too sad to tell you.'라는 문장을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오롯이 그 행위를 함으로써.
직접적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인 그 이상한 시적인 아름다움을 나는 탐한다. 솔직한 자신의 더러운 이면을 드러내면서, 그 드러냄이 아름다움을 획득하는 과정을 욕심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작년에 만났던 아름다움은 각기 달랐지만 끝내 그들에게 붙일 수 있는 단어는 '아름답다' 뿐이었다. 앞으로도 수많은 다른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누군가 아름다움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기력을 얻게 될 것이다.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여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어느 가족(Shoplifters)>,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8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7
<여름, 스피드>, 김봉곤, 문학동네, 2018
<Fall Ⅰ>, Bas Jan Ader, 16mm, 24 sec, 1970
<I'm too sad to tell you>, Bas Jan Ader, 3'34 sec,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