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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Jun 18. 2019

나는 아빠의 슬픔을 모른다.



  밤샘 일을 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잠을 열 시간 넘게 몰아자고 출근하는 지하철이었다. 멍하게 건너편을 바라보다 하릴없는 손가락으로 인스타를 뒤적였다. 우연히 아빠와의 여행을 올려놓은 피드를 보았다. 일전에 일이 끝난 후 가게 될 여행을 계획하고, 여권을 갱신하는 과정에서 아빠를 잠깐 떠올렸다. 아빠는 한국 땅을 벗어난 적이 없다. 여권을 가지는 작은 두근거림, 이곳을 벗어나 다른 곳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설렘을 가져본 적이 없다. 아빠가 비행기를 탄 일이라곤 친하게 지냈던 동네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장례를 참석하기 위한 제주행이었다. 아주 오래전이었다. 아빠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서 소감을 들려줬다. 그때 들었던 아빠의 기분은 한 장면으로 남았다. 탁한 오렌지빛을 배경으로 비행기의 창문을 응시하는 아빠의 옆모습으로. 가족 여행 갈 짬이 없었다. 고작 네 명의 일정은 어찌 그리 한 번 맞지 않았던지. 앨범 속 많지 않던 여행사진들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스무 살을 넘기고 겨우 제주도로 잡았던 가족여행에 아빠는 참여하지 못했다. 엄마와 나와 동생은 택시기사님의 안내에 따라 관광지를 정신없이 쏘다녔다. 손가락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로 멈췄다. 결핍의 감정인지 죄책감인지 부끄러움인지 서글픔인지 찾으려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울었다.



  전주로 출장을 왔다. 쉬는 날 없이 야근이 계속 이어졌다. 또 급히 피로해지고 불행해졌다. 서울을 떠나기 전, 작년을 마무리하면서 들었던 수업의 숙제를 제출했다. 그 답변이 조금 늦게 전주로 날아들었다. 컴컴한 침대에 누워 홀로 켜져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다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 것 같다는 말에 또 눈물을 흘렸다. 살갗에 닿아 내리는 촉감이 익숙해질 즈음, 무엇 때문에 우는 걸까. 이렇게 자주 우는 것은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일 것이라고, 그래서 툭하면 울어버리는 것이라고 눈물의 원인을 찾으려 꼬리를 물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을 하는 처지가 안타깝고 화가 나서 일까. 글에 대한 답변이 위로처럼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복합적인 것인가.


   새하얀 시트 위에서 바로 앞에 놓인 커다란 티비를 향해 리모콘을 들었다. 종종 보던 <나 혼자 산다>가 하고 있었고, 티비 속 김충재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작디작은 여인의 손에 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지에 대해 말했다, 결국 그는 눈물을 보였는데, 그것이 아빠의 부재 때문인지,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인지, 자신에 대한 죄책감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나의 눈물의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오랜만에 아빠가 꿈에 나왔다. 꿈의 기억은 삶을 살아가면서 순식간에 흩어진다. 마치 꿈을 기억하면 삶을 살아나갈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잊는다. 제대로 된 기억은 없고 아빠의 희미한 미소만 기억난다. 아빠의 동료가 말했다. 항상 쑥스러운 듯 웃었다고. 경비 기사님을 볼 때면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는 퇴직 후 할 요량으로 경비 교육 관련 자격증을 땄다. 나는 그 흔한 운전면허증도, 토익점수도 없지만 아빠는 퇴직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에서 소방 관련 자격증을 땄다. 아빠와 산책을 하며 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면서 아빠는 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지 않니 라고 말했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길에는 산모퉁이 주택들을 보면서 월세를 받아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퇴직 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리고 아빠에게 퇴직 후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당신 엄마 맞아?(Are You My Mother?)>, 앨리슨 벡델, 


  아빠가 왜 죽음에 이르렀는지 그 원인을 나는 모른다. ‘아빠한테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러주고 싶다고,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벡델의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종종 내가 바라는 진실을 믿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나의 의견일 뿐이었다는 것을, 아빠에게 그 무엇도, 그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개의 길로 밖에 이야기되지 않는 사건에 진실은 복합적이었고, 한 가지의 원인으로 설명될 수 없었다. 나의 의견을 져버린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던 무의식이었을까. 도망가고자 한 핑곗거리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언젠가는 상상도 못한 남루한 모습으로 다가와 새벽녘에 울다 깬 적이 있다. 내가 아빠에게 갖는 감정은 얼마나 꼬여있는 건가. 하나의 감정이 아님을, 그러니까 나는 아빠의 슬픔을, 그리고 나의 슬픔을 적확한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아빠에 대한 글을 쓴다. 아니, 아빠를 떠올렸을 때의 나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글을 쓴다. 그것은 나의 감정을 나에게 설득하는 일이었다. '아빠'의 글은 영영 쓸 수 없음을 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임을 인정하기란 어렵지만 쉬운 일이었다. 아빠는 미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까. 아빠를 두고 글을 쓰는 일이.



너 사는 섬엔 아직 썰물이 없어

결국 떠내려온 것들은 모두 니 짐이야


  검정치마의 앨범 <THIRSTY> 중 <섬(Queen of Diamonds)>라는 곡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멍하니 노래를 듣다가 너무 좋다는 생각을 했다. 왜 좋을까 생각했다. 공백이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적당한 거리감과 파고들 수 있는 공기가 존재했다. 공백이 가사와 가사의 사이를 풍성하게 채운다. 일일이, 감정과 이야기를 끊임없이 떠드는 것이 공허하다는 듯이. 어차피 공백은 채울 수 없고, 나는 아빠를 다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 아빠의 죽음 또한 아빠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공백이므로.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다. 마지막 퍼즐은 아빠가 가지고 있고, 아빠는 지금 없으므로. 그 퍼즐은 내 수중에 없다. 퍼즐은 완성될 수 없다. 하지만 맞춰지지 않은 미완의 퍼즐을 바라보는 것,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빠를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그것은 아빠의 슬픔이 아니라 내가 이해한 아빠의 슬픔, 나를 통해 이루어진 슬픔이겠지만. 





<나 혼자 산다>, MBC, 2013 ~

<당신 엄마 맞아?(Are you My Mother?)>, 앨리슨 벡델, 2019

<섬(Queen of Diamonds)>, 검정치마, 2019


* 표지 이미지 : <재미난 집(Fun Home)>, 앨리슨 벡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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