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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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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Sep 09. 2018

멸치육수와 막걸리


   현관문을 들어서면 감칠내와 약간 비릿한 냄새가 차오른다. 중문을 열고 부엌으로 다가서면 커다란 냄비에 멸치 몇 마리와 양파 반쪽, 다시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수증기가 자욱이 위로 올라선다. 익숙한 냄새는 본가에 도착하였음을 상냥하게 알려준다. ‘너 지금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왔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딸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멸치육수를 끓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통통하게 퍼져버린 멸치와 양파, 다시마를 채에 건져 올린다. 이제 육수를 베이스로 음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지락을 아낌없이 넣은 칼국수나 매콤한 떡볶이, 뚝딱 끓일 수 있는 된장찌개까지.      


  자취방 냉동고에 음식물 쓰레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재료는 멸치육수 팩이다. 재료를 낱개의 팩으로 포장하여 한 명의 식구라도 알차게 먹을 수 있도록 출시된 근래의 경향. ‘혼자라도 잘 차려 먹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구입했다. 하지만 혼자를 위해 차리는 밥상에 육수를 내는 일은 번거로웠다. 냉동 밥이나 냉동 만두가 동이 나는 동안 멸치육수 팩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 그렇게 멸치육수 팩은 냉동고의 주인이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어제는 엄마에게 북엇국을 해주겠다고 멸치육수를 끓였다. 채에 담긴 찌꺼기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물에 불어버린 이들은 아빠의 몫이었다. 아빠는 육수를 내느라 맛과 영양이 빠져버린 멸치와 양파를 항상 초장에 찍어먹었다. 음식이 남는 것을 보지 못했던 아빠는 생선뼈에 붙어있는 작은 살가치도 남김없이 먹었다.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껍질만 살 벗겨내는 아빠만의 기술이 있었다. 아빠가 깎은 과일껍질은 끝없이 이어지는 얇고 가느다란 산맥 같아 보였다. 아빠가 깎아내는 길다란 산맥을 보며 감탄했던 것이 어제의 일인 것만 같다.      


  한없이 얇은 과일 껍질과 물이 통통히 벤 멸치와 양파는 같은 톤을 지녔다. 먹고 남은 것이라는 점에서. 나물과 김치가 최고의 안주라는 어른들의 말처럼 아빠는 멸치와 양파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아빠와 장이라도 볼 때면, 아빠가 자신의 몫으로 구입하던 유일한 것이었다. 마트의 시식코너를 다 돌고 나서 아빠는 막걸리 하나를 카트에 넣었다. 과일은 내가 좋아하니까, 고기는 동생이 좋아해서, 두부와 각종 나물은 엄마의 몫으로 카트를 채웠다. 동생이 틈만 나면 투정 부렸던 밥상을 아빠는 항상 맛있다며 그릇을 비워냈다.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당신의 방법 중 하나였는지를 묻자면 당연히 후자였을 것이다. 맛은 빠져버리고 질감만 남아버린 멸치와 양파를 아빠는 막걸리로 채웠다.      


  곧장 비닐봉지에 들어가야 했던 찌꺼기를 접시에 담았다.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멸치는 의외로 고소했고 양파는 부드럽고 달큼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은 못내 아쉬워 배어있는 단물까지 꼭꼭 씹게 만들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빠와의 기억을 꼭꼭 되새기는 요즘처럼. 이제와 아빠의 맛이 궁금해졌다.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한 병 꺼냈다. 폭풍전야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잠들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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