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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iii Aug 31. 2019

불안과 한숨이 짙은 밤

*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영등포에서 일이 끝난 사촌을 만났다. 갑작스레 만난 그녀와 패스트푸드점에 갔고 지점마다 같은 맛이 나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이층에서 약간의 추위를 느끼며 그동안의 넋두리와 치부를 털어놓았다. 굶주렸던 배를 두드리며 신도림역 방향으로 걷는 동안, 여름의 끝을 향해가는 바람이 적당히 선선해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영등포의 커다란 역사와 백화점, 몇 개의 커다란 쇼핑몰이 붙어있는 거리를 조금 벗어나자 문래의 철공소, 기계와 공구를 파는 가게들이 낮은 키로 붙어있는 골목이 드러났다. 그 사이를 둘러 홍등가 주위의 여자들이 가게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천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 차가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사거리 한 귀퉁이에는 맥주집이 있었고, 고작 이층높이의 루프탑은 고층 건물과 낮은 가게들이 얼기설기 섞여있는 풍경을 하나로 보여주었다.



번영과 쇠락을 반복하는 도시에서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The Tokyo Night Sky Is Always the Densest Shade of Blue)>, 이시이 유야, 2019


  구도심은 예전의 명성과 번화, 지금의 쇠락과 이탈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다. 서울에서는 엄마가 젊은 시절 일하던 영등포가 그러하고, 내가 어린 나날을 보낸 인천에서는 주안이 그렇다. 신지와 미카는 시부야의 한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걸즈 바에서, 장례식장에서, 병원에서 연달아 부딪친다. 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공간이 그리 중요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대도시에는 무엇이 있어도, 도시에 기거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층빌딩과 공사판, 병원과 번화가, 여성전용 기숙사와 원룸으로 다닥붙은 주택들이 한 공간을 엮어낸다. 금요일 밤에 어떤 이는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일 것이고, 어떤 이는 상복을 챙겨 입고 장례식장에 갈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같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


  번영과 쇠락을 반복하는 도시는 어떤 이질적인 것이 들어와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 무엇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 이 반짝이는 절망감 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쇠락의 시작을 알리는 올림픽을 기다린다. 신지는 올림픽 건물을 짓는 공사판에서 일하고, 미카는 항상 죽음을 염두해야 하는 병원에서 일을 한다. 번영과 쇠락의 공간에서 그들은 각각 번영과 쇠락을 담당한다.


  도시의 밤하늘에는 불길하고 아름다운 푸른 달이 뜬다. 도시는 드러날 듯 보이지 않는 은폐의 세계이고, 도시 속의 그들은 욕망을 돈으로 사고 판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불안의 이유는 땅을 가려 만든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처럼 드러나지 않아 막연하다. 알 수 없다.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언제 일을 잃게 될지, 언제 사랑에 빠지게 될지, 언제 죽게 될지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벅차다.  



반쪽의 시야 


  영화 속의 그들은 계속해서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신지는 같이 일하던 토모유키의 죽음과 옆집 할아버지의 죽음을 연달아 겪는다. 미카는 엄마의 죽음이라는 과거와 골목을 돌아다니는 유기견이 곧 죽을 것이라는 미래를 바라본다. 미카가 보살피던 환자들은 대도시에 북적이는 사람만큼 계속해서 죽어갈 것이다.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신지는 한쪽 눈을 가린 채, 터무니없이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 불안을 반쪽으로 가리지 않으면, 의미 없는 말과 웃음으로 가리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는 듯이. 최근 나의 대화가 한숨과 불안으로 흔들리는 도시살이로 시작해 결국 로또나 되었으면 좋겠다는 허황된 바람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애처롭다. 예상 가능한 좋은 일은 바랄 수 없다. 그것은 대부분 좌절되고 사라져 버릴 테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희망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불안과 한숨은 마냥 검을 수는 없어서, 그래서 인가 보다. 도시의 하늘이 가장 짙은 파란색인 것은.


   신지와 미카는 각각 몇 마디 섞어보지도 않았던 동창과 전 애인에게서 사랑했었다는 말과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아직’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했었다.’는 말은 결국 과거의 단어들이어서 현재를 바꿔놓기에 역부족이다. 과거의 그들을 떠나보내고 다시 만난 신지와 미카는 비로소 서로의 불안의 이유가, 사랑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제 신지는 미카를 보기 위해 미카의 왼쪽에, 미카는 신지에게 보이기 위해 신지의 오른쪽에 나란히 선다. 그들은 말미에 가서야 ‘좋아해.’ 정도의 말을 하고, 서로는 이유의 답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의 두근거림밖에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들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사랑을 하고,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평범해지기로 한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The Tokyo Night Sky Is Always the Densest Shade of Blue)>, 이시이 유야, 2019



다들 똑같잖아, 하지만 힘내. 


  미카의 집을 다녀오고 나서 도쿄의 길거리에는 버스킹 하는 여자가 종종 힘차지만 외롭게 불렀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다들 똑같잖아. 여기는 도쿄. 하지만 힘내.’ 여전히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올 것이고, 감정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 ‘힘내.’라는 말밖에 뱉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살아나가야 하니 지금이라도.’라는 꽤나 긴 말이 생략된 것이 아닐까. 너와 나의 오늘은 똑같은 내일이 될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 아닐까.  


  그녀와 헤어진 날 밤, 꿈을 꾸었다. 친가 식구들은 재작년에는 우리 아빠를, 작년에는 할머니를, 올해는 큰아버지를 잃었다. 연마다 일어나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나약했다. 그녀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말했다. 그녀의 아빠가 술을 습관적으로 마시며 몸을 가두지 못한 채로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이 원망스럽고, 그를 찾아다니며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답답하고 서글프다고 말했다. 꿈에서는 남아있는 친가의 어른이 모두 죽었고,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었다. 평소에 볼 수 없던 모두는 고아가 되어 다시 만났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뭉치로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 이상한 기류는 우리가 똑같이 잃었고, 똑같은 결핍을 가졌다는 이상한 안심으로 이루어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똑같이 살아갈 것이고, 잃을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힘낼 수 있을까.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The Tokyo Night Sky Is Always the Densest Shade of Blue)>, 이시이 유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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