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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호 Jul 08. 2019

력사적 판문점 회담, 그 후

'평화'에 대한 통찰


지난달 30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즉흥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한국에 들른 김에 즉석으로 연락해 북의 지도자를 만나는 미국 대통령이라니!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최초로 북한 땅을 밟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말미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가세해 최초의 남-북-미 정상의 만남도 연출했다. 현장에 뒤섞인 경호원들과 기자, 통역관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문 대통령은 ‘사실상의 종전선언’이라고 말했다. 가히 ‘력사적 회담’이라 할 만하다.




반응을 살펴보면 대체로 “평화가 왔다”다. 회담 이후 문 대통령의 지지율도 소폭 상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만났다는 ‘신기하고 볼만 한’ 모습 외에,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에 어떤 실질적 성과가 있었는지에는 관심이 덜한 것 같다. 미-북은 ‘앞으로 실무팀을 꾸려 협상 재개하자’고 합의했다.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는 얘기다. 준비 없이 급하게 만난 것이니 무슨 성과가 나올 일도 사실 없었다. 혹시 그전에 있었던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었는가? 비핵화에 관한 미묘한 입장 차만 확인했을 뿐 별 것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남-북 모두 비핵화의 진전을 이룰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온 김에 ‘정치적 쇼’를 한 번 하고 지지율만 챙긴 채 돌아갔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쇼는 나머지 두 정상에게도 어느 정도 이득을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쇼냐 아니냐를 떠나서, 일단 당사국 정상들이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기에는 정말 그렇다. 서로 핵 미사일을 날리겠다느니, ‘화염과 분노’를 보여주겠다느니 하고 험한 말을 쏟아낼 때에 비하면 평화가 눈앞에 다가온 것 같기도 하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평화와 가짜 평화를 구분할 수 있는 통찰력이다.






[불구가 된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저서로, 대선 공약집이라 볼 수 있다. ‘Part4. 외교정책_평화를 위한 싸움’에서 내가 펜으로 표시해 둔 부분을 조금 옮겨보기로 하겠다. ‘외교정책에 대한 나의 접근법은 강력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 즉 힘을 통한 운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강력한 군을 유지해야 한다’. ‘이 협상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이란이 협상에 나서도록 만든 제재조치를 거둘 것이 아니라 2배, 3배로 강화했어야 마땅하다. 나라면 사정이 너무 나빠서 이란의 지도자들이 협상을 구걸할 수밖에 없도록 제재조치를 강화했을 것이다. 모든 핵시설을 완전히 해체하게 하고, 모든 원심분리기를 파괴하며, 언제 어디서든 현장 사찰을 허용하는 조건이 아니라면 절대 합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강한 군대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이 말이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만들 것이며, 우리 군인들은 최고의 무기와 보호장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 부분을 본다면 트럼프 대통령을 전쟁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은 무력의 우위로서만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고, (트럼프를 전쟁광이라고 비난하던 말던) 한-미 연합군의 막강한 군사력이 여태껏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무력을 통한 ‘진짜 평화’와, 대화와 구걸로 눈속임하는 ‘가짜 평화’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그래서 임기 초반에 북핵 문제를 정공법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을 배치하고, 당장이라도 북한을 공격할 수 있을 것처럼 압박을 가했다. 아마 위의 이란 경우처럼, 북한이 항복하고 나올 때까지 최대한의 제재를 계속 가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김정은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신년사에서 밝히고, 문 대통령이 미끼를 덥석 물면서 북핵 해결은 또다시 요원해졌다.




북핵 문제 해결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시들해진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과연 한국이 미군의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라는 생각을 할 법하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례가 있지만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지적해 보겠다. 북-중-러 연합을 견제하는 한-미-일 동맹 구도에서 한국은 끊임없이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미-중 무역전쟁 중 큰 화두가 된 화웨이 문제에서 우리 정부는 확실히 동맹의 편을 들지 않았다. ‘남북 화해 무드’에 젖어, 스스로 대북 군사대비태세를 약화시켰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하다면 미국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싸워주겠지만, 스스로 거짓 평화에 속아 나라를 지키지 않겠다고 한다면 미국도 목숨 걸고 우리와 함께 싸울 이유가 없다. 사드 배치 문제(아직까지 임시로 배치되어 헬기로 물자를 나르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 악화도 있다. 더 들려면 분량이 너무나 방대해지므로 이쯤 한다. 요점은 이미 한국은, 미국과 함께 강력한 군사적 수단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의사가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알려 준 셈이라는 것이다.




다시 판문점 회담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관계에 대해 아주 굳건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심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것이다. 재선을 앞두고 남북문제는 지금처럼 적당히 매듭만 지어 두는 정도로 묻어두겠다는 의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지금 일본과의 심각한 마찰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중재 없이 그저 묵인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과 일본이 공조해 한국이 계속해서 자유진영의 동맹에 남아 있을 것인지 시험해보는 것이다.  다음 시험은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될 것이다. 재선 이후에는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 주고 ICBM동결 수준에서 합의를 끝낸 채 한반도 일에서 손을 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더불어 ‘자유와 정의’의 비전으로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나라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테러와 타협하지 않는 나라다. 자유진영의 국가는 모두 미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우리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함께 싸웠고 미국의 도움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특별한 관계라는 뜻이다.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부친은 한국전 참전 용사다. 그들은 한국을 도와 전쟁을 치르고, 한국이 발전하는 것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미국은 약소국이 일방적으로 강대국에게 의지하는, 사실 말도 안 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우리를 지켜주기도 했던 나라다. 진주만 기습으로 한번 뒤통수를 친 바 있는 일본에 비하면, 훨씬 더 아시아의 핵심 동맹으로 거듭날 수 있는 사이다.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를 자꾸 벌리려 하는가.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북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미국이 적당한 선에서 북한과 타협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결단을 내려 ‘나쁜 딜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며 협상을 결렬시켰다. 아직까지는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본과의 마찰 문제를 비롯해 자유진영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미국이 우리와 함께 하리란 보장은 할 수 없다. ‘제2의 애치슨 라인’은 이미 그어지고 있을지 모르고, 그것이 볼거리만 가득하고 실속은 없었던 이번 ‘력사적 판문점 회담’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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