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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Jan 23. 2024

네 번 바뀐 제목 : 내가 죽으면 재를 이곳에

두 번째 산티아고 특별보너스 마지막날(Muxía-Fisterra)

#1 유럽의 끝에 서다

지난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갔을 때 피스테라(Fisterra)의 좋았던 기억을 되새길 수 있는 날이다. 특히 라시가 묵시아(Muxía)에서 피스테라까지의 길은 '판타스틱'하다고 해서 며칠 전부터 엄청 기대를 했다. 오늘 피스테라의 '0.000km'표지석 앞에서 사진 찍을 생각에 아침부터 설렜다. 유럽 대륙의 끝 피스테라에 두 번째 서게 될 것을 기대하며.


#2 끝맛 한 번 찐하네

어제 나를 모래사장에 집어던질 듯한 바람은 날이 바뀌어도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비도 좀 더 굵게 내려서 비바람을 뚫고 앞으로 나가는 게 힘겨울 정도다. 그런 비바람 속에 걷다 보니 그동안 한 번도 안쪽까지 젖지 않았던 등산화가 조금씩 축축해진다. 10km를 넘어서자 그냥 물속에 담긴 신발이 되어 버렸다. 거기에 20km 가까이 걷는 동안 문을 연 BAR가 하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어제는 일요일이라 묵시아의 모든 슈퍼마켓이 문을 열지 않아 걸으며 먹을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라시가 말한 '판타스틱'이 혹시 이것은 아니었겠지?


#3 친구들아, 미안해

그동안 걸었던 길 중에 단연 최고였다. 힘든 것으로는.

그래도 걷다 보면 어찌 됐든 숙소에 도착하고 씻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 기운이 돋는다. 힘든 하루였지만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하며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피스테라의 상징인 '0.000km' 표지석을 내일 아침에 간다는 것이다. 그동안 두 사람의 의견에 거의 따랐는데 이것만은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I wanna go to the 0km stone today."

다행히 둘 다 흔쾌히 "Okay"라고 했는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그들은 체크인하고 샤워 후에 가는 것으로 알았으나 나는 체크인만 하고 바로 가고 싶었다. 결국 5분 정도 볼라쉬가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서 우리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숙소에서 피스테라 중심부를 지나 첫 번째 표지석이 나왔는데 '2.690km'였다.

'아뿔싸. 이렇게 멀었었구나!'

0km 표지석이 이렇게 멀리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힘겹게 하루 종일 걸어온 친구들에게 왕복 5km가 넘는 길을 다시 가자고 했으니 정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안개까지 짙게 끼어 시야는 10m 밖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그쳤다는 거.


#4 내가 죽으면 재를 이곳에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0km 표지석에 도착해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좀 더 바다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곳엔 신발 한 짝만 바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철제조형물이 있었다. 라시가 "예전에 순례자들은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해서 신발이나 옷을 태워 바다에 띄우는 것을 했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래서인지 조형물 근처엔 순례자들이 벗어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신발들이 여러 켤레 있었다.

그 순간 라시가 내게 번역앱으로 메시지를 작성해서 보여줬다.

'내가 죽으면 재를 이곳에 뿌려달라고 가족들에게 얘기했어.'

"진짜?"

"I always want here."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무겁다. 결코 오늘 5만보 넘게 걸어서만은 아니다. 라시의 바람이 나중에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그전에 우리의 세 번째, 네 번째 까미노가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때까지는 너의 바람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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