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길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첫 문장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당신에게'를 떠올리자 갑자기 울컥 올라와 눈가가 촉촉해졌어요.
주책이지요? 아마도 갱년기라 그런 거 같습니다.
오늘은 당신에게 풍경 사진을 보낼 수가 없었어요. 출발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도착 때까지 그치지 않았거든요. 지난번 시행착오(26일차, '왼쪽 어깨부터 내주고 말았다'글)가 있었기에 오늘은 쉬기 위해 BAR에 잠시 들릴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비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지난번 저처럼 그 타이밍을 놓쳐서 온몸이 비로 푹 젖었지 뭐예요. 사람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어제는 파란 하늘을 가위로 곱게 오려내어 담아가고 싶을 만큼 탐이나 당신에게 찍어보내며 '여기 와서 같이 살자'라고 했더니 당신은 단박에 거절했지요. 계속 설득하는 제게 인터넷에서 캡처한 '단호박'이미지를 보내면서 말이죠.
그래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우리 '스페인 한 달 살기'를 먼저 해봅시다. 시기는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3년 후로요. 그때쯤이면 큰아들도 군대를 갔을 거예요. 혹시 안 갔다면 그전에 가도록 설득하고, 다녀왔다면 '나라도 잘 지켰으니 우리 집도 잘 지켜달라'라고 합시다.
혹시 둘째가 눈치없이 따라온다면 데리고 와야지요. 이곳엔 둘째가 좋아하는 고양이 천지라 하루종일 고양이랑 노느라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따라오지 않도록 만드는 게 최선이고요.혼자서도 잘 챙겨먹는 둘째는 은근히 자신을 두고 가길 바라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도착한 묵시아는 제주도 같은 느낌이에요. 시기 상 겨울인데도 봄기운이 느껴져요. 물론 바닷가라 바람은 좀 있답니다.
배낭 포함해서 100kg 조금 안 된 제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라시가 준 네스카페 믹스보다 더 고운 모래밭에 처박힐 뻔한 거는 아주 드문 일이에요. 갈매기가 앞으로 못 날고 옆으로 떠다니는 것은 아마도 30km 넘게 걸은 제가 잘못 본 것일 테고요.
3년 후만 생각하면 벌써부터 설렙니다. 걷는 거 싫어하는 당신을 위해 차 태워 데려가고 싶은 곳, 보여주고 싶은 곳, 맛보게 해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아 엑셀시트에 가득 채울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때까지 우리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지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