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직원동아리 '어작'의 두번째 책에 쓴 글
공장에 다니는 여섯 살 많은 누나는 주말이면 친구들 모임에 나를 데리고 나가곤 했다. 그때 누나도 아직 이십이 안 된 나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일이었을까 동생이 없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다.
어느 주말, 누나가 다니는 공장 후배들과 인천 연안부두에 놀러 갔었다. 노래방의 고정 레퍼토리처럼 관광지마다 손금, 관상 등을 보는 곳이 그때는 꼭 있었다. 그날 같이 간 형과 누나들이 손금을 봤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나까지 덩달아 봐주셨다. 복채를 낸 게 아니라 대충 봐주셨겠지만, 그분은 내게 “책상에 앉아서 일할 팔자”라고 했다.
대학 때였다. 친구들이랑 있으면 치기 어린 마음으로 평소 안 하던 장난도 하게 되는데 그날도 그랬다. 친구들이 본다고 하니 나도 같이 관상을 봤는데 이번에도 “공무원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네 이름에 장남이 써야 하는 ‘으뜸 원(元)’자가 들어가 있어 형에게 갈 기운을 뺏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형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학력 때문인지 형은 결혼 후에도 여러 번 직장이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내 이름 탓인가 싶어 마음이 아팠다.
임용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조간신문에서 봤던 ‘73년생 소띠’의 운세도 관상가가 했던 ‘나의 (운명의)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두 관상가의 말처럼 24년째 그 길을 걷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그동안 여러 번의 오르막과 내리막, 그늘 한 점 없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 고스란히 노출되는 힘겨운 시간을 지나왔다. 작년부터는 쉽게 꺼내지 못했던 개인사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 고통스러운 작업이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니체만큼 필연적인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주어진 운명에 대해 최소의 거부감으로 최대의 즐거움을 추구해 보려 한다.
“아모르파티Amor fati”를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