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교단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미노 Feb 07. 2024

호구와 미친개 사이에서

- 교직원동아리 '어작'의 두번째 책에 쓴 글

단호하면서도 친절하기, 완벽한 조합이지만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친절함은 수용, 긍정, 사랑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단호함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일정한 경계를 설정해준다. 친절하기만 하고 단호하지 않으면 교사가 유약해 보이고, 학생들은 안정감을 느낄 수 없어 불안해한다. (중략) 반면에, 교사가 단호하기만 하고 친절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교사와 중요한 정서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 마이크 앤더슨, '교사의 말' 중에서


어떤 샘이 알려준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를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내 설문에 참여하게 했다. 십여 명 참여한 결과를 보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생각보다 당신이 경쟁적인, 단호한, 도전적인, 성취가 중요한, 의지가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 문장에서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단호한’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단호한 편이라고 느끼지 않는 걸까? 한참 동안 ‘단호하면서도 친절한 교사’가 카톡에 내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복도 양쪽으로 교실이 있던 학교였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내가 복도를 걸어가면 마치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복도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장난치던 아이들이 양쪽 교실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텅 빈 복도를 거닐면서도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내가 맡은 학생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학생부 교사로서뿐만 아니라 담임으로서도 무척 엄격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달하라는 내용은 매일 교무수첩 해당 일의 메모 칸이 차고 넘쳤다. 이미 종례를 마친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 복도 쪽 창문에 여름밤 불빛을 찾아 들어온 나방처럼 얼굴을 내밀며 ‘빨리 끝내’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벗어날 생각에 마음이 들뜬 아이들이 담임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데도 그때는 거의 매일 화를 내면서 종례를 마쳤다. 처음에는 딴짓하는 몇몇 아이들에게 화를 내다가 어느 날부턴가 ‘단합’을 강조하며 ‘단체 기합’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종례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아이들과의 거리는 종례 시간의 제곱만큼 멀어져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화병이 나서 죽거나 화를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죽게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첫 발령지였던 중학교를 떠났다. ‘중학교 부적응 교사’라는 딱지를 붙이고. 고등학교 아이들은 확연히 달랐다. 특히 전국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입시 명문 고등학교라서 그런지 일일이 잔소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사들보다 더 앞서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에만 그렇게 행동했고 공동체를 위하는 일에서는 중학교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3 여학생반 담임을 맡았을 때였다. 교실이 있던 층 여학생 화장실이 우리 반 청소 구역이었다. 선뜻 나서서 화장실 청소 담당을 맡겠다는 아이가 없었다. 어르고 달래고 어찌어찌해서 5명의 청소 담당이 정해졌지만, 청소가 깨끗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충 물만 뿌리고 끝났다고 찾아온 아이들과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 보면 변기에 들러붙은 똥이 여전히 있었다. 끝이 둥그런 플라스틱 솔로 몇 번의 솔질을 해서 변기를 닦았다. 아이들은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만 볼 뿐 거들거나 자신들이 하겠다며 절대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청소하고 나오면 지나가는 아이들이 깜짝 놀라서 쳐다본다. 

“선생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어느 날 익명의 이메일이 왔다. 아이들이 운영하는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라며 캡처한 내용도 함께 보내왔다. 거기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쉽게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호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20여 년 교직 생활을 미친개와 호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누군가 “기질적으로 둘 중에 어느 것에 더 가까우냐?”라고 묻는다면 “미친개”에 가깝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갈수록 교사의 친절함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면서 미친개로 교직 생활을 하기엔 너무나 외롭다. 우리 반 아이들이 어떤 일이 생길 때 옆 반 담임을 먼저 찾아가 상담하는 것을 몇 번 목격하게 되면 더 이상 단호함을 고집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친절하게 대하다가 어이없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게 되면 교직에 대한 자괴감을 넘어 인간에 대한 환멸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여전히 난 호구와 미친개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어느 연수에서 ‘매우 친절한 교사’를 0, ‘매우 단호한 교사’를 9라고 했을 때 자신은 몇 정도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난 7.6이라고 했다. 5와 6 사이로 넘어가지 못함을 못내 안타까워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