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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Feb 10. 2024

캡슐커피의 비밀

- 교직원동아리 '어작'의 두번째 책에 쓴 글

(이 글은 전삼혜 작가의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를 읽고 쓴 습작 소설입니다.)


머리맡에서 진동이 울린다. 잠들기 전에 침대 헤드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5시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옆에서 자는 아내를 깨우게 될까 봐 서둘러 휴대전화의 진동을 껐다. 그대로 누워 오늘 하루에 펼쳐질 일들을 떠올린다. 간단한 아침 식사, 자전거 출근, 샤워, 커피 내리기, 세미나실에서 책 읽기, 수업 준비, 수업, 퇴근, 프로야구시청. 어제의 삶을 ‘Ctrl+C’ 해서 ‘Ctrl+V’ 해놓은 것처럼 새롭게 일어날 일은 그려지지 않는다.


포트에 물을 끓여 머그잔의 절반이 차도록 붓는다. 냉장고에 있는 차가운 생수로 나머지 절반을 채운다. 그렇게 먹어야 몸에 좋다는 어느 한의사의 말을 듣고 벌써 몇 년째 공복에 마시고 있다. 그 이후로 몸이 더 좋아졌다는 느낌은 없지만, 이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왠지 하루가 찜찜하다. 구운 달걀과 약간의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패드가 있는 자전거 빕을 입는다. 여기에 바라클라바, 고글, 헬멧, 장갑을 착용한다. 현관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한다.


자전거의 라이트를 켜야 하는 6시, 오늘도 아파트 후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평속 22km, 약 48분 정도를 달리면 학교에 도착한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곧바로 세탁실로 향한다. 청소 주무관이 사용하는 청소도구와 세탁기를 거쳐서 나온 걸레들이 널려있어 쾌적한 편은 아니지만 바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전기온수기가 있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도 덜덜 떨면서 씻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샤워를 마치고 교무실에 올라오면 전날 열심히 달렸던 캡슐커피머신의 물통을 씻는다. 씻은 물통을 다시 머신에 장착하고 작동 버튼을 연달아 세 번 누른다. 이제부터 몇 분 동안 클리닝이 시작된다. 전날 사용된 캡슐의 수만큼 물 색깔이 짙어진다. 어제는 많은 사람이 이용했는지 머신이 짙은 갈색의 물을 내뱉는다. 청소가 끝난 머신에 몇 년째 마시고 있는 ‘멜로지오 커피 캡슐’을 넣고 뚜껑을 닫자 캡슐에 구멍을 뚫는 소리가 난다. 작동 버튼을 누르니 ‘윙’하는 기계음과 함께 커피가 내려진다. 거품과 함께 텀블러의 절반 넘게 채워진 커피를 들고 내 자리에 와서 유튜브를 열어본다. 여기까지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어나는 나의 일상이다.


유튜브를 켜자 평소 자주 보는 여행, 시사, 운동, 영화 리뷰 등의 창들이 보인다. 그중에서 그날 마음이 끌리는 것을 클릭한다. 그런데 오늘은 ‘소행성 충돌’, ‘제네시스’, ‘지구 종말’ 등의 섬네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새로 개봉한 영화인가? 다시 보니 방송국의 공식 채널이다. 타이틀에 ‘[속보]’라고 붙어 있어 마우스로 그곳을 찾아 누른다.

‘1주일 후에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고, 이를 막는 방법은 현재로는 없다. 1주일 후에 지구의 거의 모든 문명이 사라질 것이다.’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는다. 이게 사실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다른 방송국의 뉴스를 클릭한다. 새로운 내용은 없다. 그렇게 몇 개의 다른 뉴스를 찾아봐도 ‘1주일 후에 소행성 충돌로 지구 문명이 사라진다.’라는 뉴스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아직 자고 있을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연결되지 않는다. 자서 못 받는 것인가? 휴대전화를 보니 신호 자체가 가지 않는다. 아마도 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거의 모든 사람이 동시에 휴대전화를 붙잡고 누군가를 찾고 있나 보다. 학교의 유선전화를 집어 들었다. 평소 수화기를 들었을 때 나던 윙~ 하는 대기음이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전화마저 먹통이 된 거 같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집으로 다시 가야 하나? 아니면 학교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려야 하나? 다른 교사들이 출근하기에는 아직 30분 이상이 남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는다. 유튜브도 ‘접속할 수 없다’라는 에러 메시지를 몇 분 전부터 띄우고 있다. 가방을 챙겼다. 다시 집으로 가야 한다. 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 믿지 않겠지만 1주일 후에 세상 종말이 올 거라며 빨리 대비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대비….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대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처럼 개인 우주선이 있어서 그걸 타고 지구 밖으로 피신할 수도 없고, 지하 수백 미터의 벙커를 파서 숨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 가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옷 갈아입을 여유도 없다. 근무 복장 그대로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갈 것이다.


교문을 나서는데 익숙한 흰색 승용차가 교문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멀쩡한 그랜저를 올해 초에 제네시스로 바꾼 S였다. S를 보는 순간 차를 얻어타면 훨씬 빨리 집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버려두고 S의 차가 멈춘 곳으로 달려갔다. S가 창문을 내리고는 타라고 손짓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집으로 가 달라고 부탁했다. S가 서너 번 집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어서였다. S는 아무런 대답 없이 차를 되돌려 교문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도로는 무법천지로 변해 있었다. 신호등은 이미 거추장스러운 도로구조물에 지나지 않았다. S의 놀라운 운전 솜씨로 뒤엉켜 있는 차들을 겨우 피해 큰 도로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S는 큰 도로로 접어들자 좌회전하며 우리 집과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우리 집은 반대 방향이야.”

“저도 알아요. 지금 저희는 부장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가장 유일한 방법을 향해 가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동안 부장님께서 마셨던 캡슐커피는 사실 특수제작된 커피였어요. 그 안에는 저희 제네시스에서 개발한 특수물질이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뭐? 제네시스? 우주선 만드는 곳 말이야? 근데 제네시스에서 왜 나한테 커피를 마시게 해? 그리고 캡슐은 2층 교무실 선생님들한테 M이 신청받아 공동구매 해서 마셨던 거라고.”

“사실 M도 저희 제네시스의 블랙요원이에요. 지금 상황이 긴박해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 아무튼 그 커피가 부장님 몸을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무기로 만들어줬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그걸 위해 우리는 소행성 충돌이 예측됐던 시점부터 전 세계 333명의 건장한 남자들을 선발해 지금까지 매일 특수물질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게 했어요.”

“말도 안 돼. 내 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맞아요. 그렇게 느끼셨을 거예요. 어마어마한 충격이 가해질 때 그 물질은 혈액과 섞이며 굉장한 폭발력을 지니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이번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험이라는 거에요.”

“뭐? 내가 실험 도구였단 말이야?”

“죄송해요.”

“만약 내가 그 실험에 참여하지 않겠다면?”

“그건 부장님 자유에요. 다만 소행성과 지구가 충돌할 때 부장님 때문에 소중한 부장님의 가족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라는 것만 알고 계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때문에 가족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소행성과 충돌했을 때 생존 확률은 3.8% 정도 된다고 해요. 만약 우리의 실험이 실패해서 혹시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부장님 가족 중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어쩌면 한두 명 정도는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데 부장님이 저희와 함께 가지 않고 지구에 남아 소행성을 맞이한다면, 부장님 몸이 폭발하면서 반경 10km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목숨을 잃게 될 거예요. 부장님 때문에 혹시라도 살 수 있었던 사람마저 죽게 된단 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S의 설명을 듣는 사이, 우리가 탄 차는 지하도를 달려 벙커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엔 이미 수많은 다국적의 남자들이 열 맞춰 서 있었다. 그때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소리쳤다.

“자, 이제부터 한 줄로 우주선에 탑승하겠습니다.”

자세히 보니 J였다. S는 J가 제네시스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선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J, M, S가 모두 제네시스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나를 인간 폭탄으로 만드는 프로젝트에 몰래 끌어들였단 말이 아닌가.

“왜 하필 나였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정말 죄송해요. 부장님은 이제 자녀들도 어느 정도 컸고,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언제든지 본인을 희생할 수 있는 분이라고 저희는 판단했어요.”

“저희라면? M하고 J도 같은 생각이었단 말이야?”

“네.”

이때 J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부장님만 탑승하면 됩니다.’라고 J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우주선에 오르니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탑승한 사람들 표정에서 숙연함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잠시 후 거대한 우주선이 불을 뿜으며 대기권을 벗어났다. 모니터는 점점 멀어지는 푸른 별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푸른 별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말하는 듯. 그 순간 팽그르르 눈물이 돌더니 뜨거운 것이 눈가를 타고 흘러 양 뺨을 적시며 들썩이는 어깨 위로 하염없이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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