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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Aug 01. 2020

민관협력이 뭐길래

사회복지 민관협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나는 사실 사회복지를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으로 구분하는 것을 극혐(!)하는 사람이지만, 글을 쓰다 보니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서두에 미리 말해 두겠다. 이 글에 나오는 ‘공공’과 ‘민간’은 모두 사회복지분야에 해당하는 것이고, 문맥에 따라서는 공무원과 (민간)사회복지사를 의미할 때도 있다. ‘민관협력’도 사회복지분야에 한정된 의미로 쓰였다. ‘사회복지’ 또한 민간위탁형태의 민관협력분야에 한정해서 쓰였음을 밝힌다. 사회복지를 ‘공공’과 ‘민간’으로 구분해서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참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한 심정에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지난 4월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어느 날, 퇴근시간이 다 될 무렵에 서울시청에서 관내 복지관으로 내려 보낸 한 통의 공문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공문의 내용은 서울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재난긴급생활비를 지원하는데 주민센터에서 현장접수를 할 사람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원요청 인원을 복지관 직원의 절반 이상이라고 명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명단을 바로 다음 날까지 제출하라며 친절하게 양식까지 첨부해 주셨다. 공문을 받아 든 복지관의 반응은 싸늘했다. 시청에서 업무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버저비터로 불쑥 공문을 보내 바로 다음 날까지 실적을 보내라며 호들갑을 떠는 일은 이젠 더이상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코로나-19 때문에 복지관이 문을 닫아 분위기도 어수선한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직원들을 (그것도 절반이상을) 주민센터로 파견해 달라는 요청은(지시는) 해도 너무하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복지관에서 난색을 보이자 서울시는 “공문을 보내기 전 복지관협회를 통해 관장님들과 미리 협의를 했고 동의까지 받았다.”고 해명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회복지노동조합에서 성명서를 내고 막무가내식 공문을 내려 보낸 서울시뿐만 아니라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을 내팽개친 협회와 관장들도 문제가 있다고 반발했다. 엉뚱하게도 비난의 화살이 복지관협회와 관장들에게 쏠리자 급기야 복지관협회는 서울시에 개선을 요청한다. 이에 서울시는 부랴부랴 다시 공문을 보내 지원인력은 구청과 관할 복지관이 잘 협의해서 확정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렇게 공공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싸운 민간의 하극상(?)은 허무하게도 하루만에 끝났다. 그런데 사실 공문의 문구(文句)만 좀 바뀌었지 결과는 애초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결국 공공과 민간의 기싸움에 애꿎은 사회복지사들만 억지로 물가에 끌려가는 소처럼 열흘 동안이나 주민센터로 출근해야만 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주민센터로 간 사회복지사들은 뙤약볕아래 주차장에 임시로 친 천막 안에서 공무원들의 온갖 푸대접과 눈칫밥을 먹어가며 그들의 일을 대신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회복지는 민관협력이 중요하다

  요즘 사회복지현장에서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보고서를 쓸 때 민관협력이 빠지면 왠지 뒤끝이 개운하지가 않고 일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마치 몸에 배인 듯 습관처럼 민관협력이란 말을 별 생각 없이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민관협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민관협력을 제대로 알고나 있긴 한 걸까? 사회복지는 (왜 그런지는 잘 몰라도) 그저 민간과 공공으로 나눠져 있고, 그 둘이 서로 업무협약이라는 걸 맺고 함께 일을 하면 그것이 곧 민관협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는 정도였지 솔직히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실 알고 보면 민관협력은 보고서를 쓸 때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단순했다. 원래 민관협력은 공공(公共)이 공적인 업무를 민간과 함께 공동으로 수행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공적인 업무라는 것은 국민의 생존과 관련하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수행할 책임이 있는 국가적 차원의 업무를 말한다. 예를 들면, 도로나 철도, 전기(발전소) 등 국가기간시설의 건설이나 유지를 위해 민간 자본을 유치(PFI)하거나 공적 기업의 민영화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사회복지시설운영과 같은 행정업무를 민간에 위탁하여 수행하게 하는 민간위탁과 행정조직구성에 민간이 참여하는 형태까지도 민관협력의 한 형태라고 본다. 쉽게 말해 민관협력은 결국 공공에서 해야 할 일을 민간의 손을 빌려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관협력의 본래 의미를 알고 보니 지금의 사회복지는 이미 민관협력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복지는 공적인 업무이고 그걸 민간에게 위탁하여 수행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전형적인 민관협력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복지는 이미 민간위탁을 통해 민관협력을 실현하고 있는데 더 이상 무슨 협력이 또 필요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회복지는 지난 50년이 넘도록 공공의 역할을 민간이 대신해 오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서로 협력하고 있으면 고마워할 법도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실에서는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앞서 서울시의 사례만 보더라도 유례없는 코로나-19의 재난상황에서 공공과 민간 복지관이 서로 힘을 합쳐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인 시청의 행동은 어째 좀 강압적이고, 협력의 당사자인 복지관은 왠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모양새다. 공공과 민간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어딘가 많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갑과 을
대행자 vs 동반자

  어떻게 보면 사회복지 바닥(?)에서 공공과 민간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기 보다는 갑과 을의 상하관계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실제로 민간위탁 계약서에도 그렇게 쓴다. 거기서 갑은 당연히 공공이고, 을은 위탁을 받는 민간이 된다. 민간위탁은 민관협력의 방법 중 하나이고 협력관계라면 당연히 서로가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라야 할 텐데 계약서를 쓸 때부터 이미 서열이 정해져 있는 셈이다. 시작부터가 이런 식인데 공공과 민간이 서로 사이가 좋을 리가 없고, 불균형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협력이란 게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만무하다. 민간은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법적, 행정적인 승인(재위탁)에 대한 권한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재정지원(일명 돈줄)을 공공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공무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권력-의존관계 속에서 공공은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민간의 도움을 받아 수행하고 있음에도 고맙기는커녕 때로는 관리와 규제가 도를 넘는 경우가 많다. 공무원의 입장에서는 규정에 따라 본연(관리감독)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고 하소연 할 수도 있겠지만 민관협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관리감독 이전에 먼저 민간에게 조력자로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원래 협력(또는 연대)은 당사자 모두에게 이익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공공은 민관협력을 통해 민간의 지식과 노하우를 활용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해 효율성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여 공익적 목적을 달성하는 게 본래의 의도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민간의 의도는 공공 분야로 사업 활동의 폭을 넓히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이익을 위해 다른 한 쪽이 희생하는 것을 두고 협력이라 말하는 바보는 없다. 이것은 선량한 목적의 사회복지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사회복지 민관협력도 공공이 얻는 이익과 민간이 얻는 이익이 반드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관협력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자가 추구하는 이익을 존중하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동반자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관협력은 거버넌스?!

  우리(민간)가 가끔 민관협력을 거버넌스(governace) 또는 협치(協治)라고 하는 것은 민간의 입장에서 좀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정부가 국가를 원활하게 통치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기 때문이다. 거버넌스와 협치(‘치(治)’는 다스릴 치)는 이미 어휘에서부터 정부(government)의 통치양식과 상명하복의 관료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거버넌스가 공공이 민간(조직)을 관리감독하기(다스리기) 위한 말이라는 것도 자존심 상할 일인데, 하물며 그걸 민간이 아무 거리낌 없이 되받아 쓰고 있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요즘처럼 사회복지에서 자나깨나 거버넌스를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버린 사회복지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아니 어쩌면 거버넌스의 마법에 걸린 민간은 이미 공공보다 더 관료화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거버넌스(또는 협치)라는 말이 민관협력을 유식(?)하게 표현한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진짜 유식한 사람들은 민관협력을 다른 말로 PPP(Public-Private Partnership)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공공과 민간의 파트너십’. 나는 거버넌스보다 이 말이 훨씬 마음에 든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거버넌스와 협치를 무식하게 민관협력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과거에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 민관협력을 거버넌스 관점으로 보면 협력의 대상이 파트너가 아니라 대행자(agent)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민-관 협력을 위해서라면 서로를 믿음직한 파트너(동반자)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사람냄새가 풍기는 인간적인 협력관계라면 말이다.


...협력인듯 협력아닌 협력같은 민관협력.... 알쓸복잡

#epilogue

  누가 나에게 직업이 무어냐고 물어오면 나는 당연히 사회복지사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내가 만약 내일 당장 공무원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사회복지사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내가 사회복지사인 것은 나는 민간분야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회복지사가 (어쩌다) 공무원(고위직 또는 단체장, 시도의원 등)이 되면 마치 큰 경사라도 난 듯 내 일처럼 기뻐하던데, 사회복지사가 사회복지사의 신분을 버리고 공무원이 된 일이 그렇게나 기뻐할 일일까 싶다.

  우리나라에는 민간 사회복지사는 있어도 공공 사회복지사는 없다.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사일 뿐이지 민간과 공공이 따로 있을까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사회복지사는 민간인 신분일 때나 사회복지사지 공무원이 된 사회복지사는 관료조직에 들어간 이상 그냥 공무원일 뿐이다. 혹자는 사회복지사가 공무원이 되었더라도 사회복지사 자격이 있으니 당연히 사회복지사라고 우길 수는 있겠지만, 길을 가다 그분들(습관적 존칭)을 붙잡고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오?"라고 물어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만약에 정말 그분들이 스스로 사회복지사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민관협력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사람이 출세를 해 입신양명하겠다걸 누가 뭐라 하겠나. 다만 사회복지가 민간이냐 공공이냐에 따라 사회복지사의 신분이 오락가락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Believe or not! 사회복지가 어쩌다 민간영역과 공공영역으로 나눠진 줄 아는가? 그 이유는 다름아닌 민관협력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버넌스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부가 사회복지를 혼자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공적업무를 민간에 위탁했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공공과 민간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공적업무를 민간에 넘기니 민간업무가 되버린 마법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 민관협력(거버넌스)이라는 개념이 없었더라면 사회복지는 지금까지 공공의 정책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 것도 서글픈 일인데 원래는 하나였어야 할 사회복지마저 둘로 쪼개진 현실도 서글프긴 마찬가지다. 사회복지는 언제쯤 하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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