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질환을 겪은 지 5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선뜻 꺼내는 일은 부끄럽다. 공황장애를 시작으로 우울증을 지나, 지금의 나는 양극성 장애 1형도 2형도 아닌 비전형적 기분장애의 선상에 놓여있다. 병의 뜻도, 공통적인 증상도 설명할 수 없다. 코로나 증상을 예로 들면 발열과 인후통, 두통, 코막힘, 속 울렁거림, 근육통 등 다양한 통증 표현이 존재하지만 유독 정신건강의학과 질환은 표현하기 힘든 상태가 많다.
세상을 살면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 있을 때 나는 종종 비유나 은유를 사용하곤 하는데, 정신 질환은 그림으로 표현해야 해야 그 정확도가 좀 더 높아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 치료 가 언어 치료뿐만 아니라 미술 치료, 모래 치료 등의 다양한 치료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필수불가결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땅 끝으로 추락한다면
조증을 겪을 때는 조증인지를 알지 못했다. 지난 8월의 어떤 시기부터 에너지가 비약적으로 상승해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처럼 취업 준비도 시도했고, 여름날에 땀을 흘리며 돌아다니는 평범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정말 기쁜 일이었다. 남들이 다 하는 만큼 시도할 힘이 있었다는 것이. 지나치게 어려운 점이 많았던 회사도 계속 다녀보기 위해 아등바등 버텼다. 버티는 내가 대견했고 삶을 살아가는데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퇴사 일주일 전에는 그동안 못했던 강의 듣기를 하고 사이드 잡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퇴사 다음 날, 건강을 회복하겠다며 하루에 3천 보 걷던 수준이던 내가 10km를 걸었다. 운동을 하면 도파민이 나온다는데, 그 때문인지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을 더욱 인지하지 못했다. 과분한 에너지가 컨트롤이 안됨을 깨달아 의사 선생님께 급히 말씀을 드렸더니 약 조절을 해주셨다. 상담 선생님과 상황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내가 지나치게 에너지가 들뜬상태임을 깨달았다. 들뜬상태는 주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자, 조증임을 깨달은 지 사흘 만에 우울이 찾아왔다.
커다랗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찬 물이라도 끼얹은 듯, 내 삶의 에너지는 연기만 남긴 채 꺼졌다. 조증이 꺼지고, 어두운 바다 너머로 우울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우울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침대에서 몸이 떨어지지 않았다. 침대가 지구 중력의 2배 힘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분명 8층에 있는데 땅 끝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라도 즐겁자 하고 보고 싶었던 영화나 유튜브를 틀어놔도 즐겁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더 이상 계획 조차 할 수 없었고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신체에도 에너지가 돌지 않았다. 들뜬상태의 나였다면 잠시 쉬고 일어날 수 있었을 텐데. 오랜만에 겪는 우울은 평소의 지침과는 완벽히 달랐다.
발 디딘 곳을 인정하기
추락해 버린 자신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세상의 모든 자괴감이 닥쳐온다. 우울한 시기를 겪을 때 돌고 돌던 패턴을 반복한다. 한 번에 연결이 되지 않는 1393 전화를 걸어놓고 기다리고,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를 검색해 보고, 이제는 매달리지 않을 베란다를 바라본다. 집에 쓰레기를 쌓아 놓고,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상태로 끝나지 않는 감정의 폭풍에서 소용돌이친다. 예고 없이 다가오는 불행은 사람을 더욱 좌절시킨다. 지나치게 우울할 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마음의 준비라도 해둘 수 있을 텐데. 작은 조각배를 타고 있는 삶이라면 물고기를 더 많이 잡아 놓으려나?
다행인 것은 병과 싸우는 법을 배우며 나는 폭풍이 코 앞에 닥친 것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인지할 수 있게 됐다. 코 앞에 닥쳤다면 피할 수 없기에,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가족에게 전화를 해서 좋지 않은 상태임을 고백하고, 사람들에게 너무 깊은 곳으로 추락하지 않게 양지로 꺼내달라는 부탁을 내민다. 그리고 폭풍에 휘말리게 되면, 그대로 그것을 겪어낸다. 발 디딘 곳이 깊게 파인 동굴이라면 동굴에 있음을, 공중에서 맨발에 물길만이 느껴진다면 폭풍에 있음만을 생각한다.
그곳에 있는 나를 부정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내가 생존해 있음만을 느낀다. 어디에 서있는 자신이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이 폭풍이 언젠가는 끝날 것임을 알기에. 아무리 완치가 어려운 조울증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에너지 넘치는 들뜬 기분은 온다. 잠시라도 그런 에너지가 생긴다면 살아가는 일이 다시 기뻐질지도 모른다.
잘 가 조증, 언젠가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