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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준호 Jul 31. 2018

23화. 스피치, 붉은 여왕의 조언

거울나라의 앨리스, 붉은 여왕의 법칙(Red Queen Effect)

"죽을 듯이 열심히 해" 2004년 봄, 아나운서국 신입사원 OJT가 막 두 달로 접어들고 있었다. 도대체 '입봉'이라고 하는 첫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매일매일 지속되는 리딩과 모니터링, 선배들의 수업으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가끔 저녁에 술을 한 잔 하자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신입사원 연수 기간에는 선배들이라고 해도 허락 없이 신입사원을 불러낼 수 없었던 규정 때문에 그마저도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무료함이 지속되던 날 우리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말로만 듣던 손석희 선배의 수업시간이 된 것이다. 항간에는 무섭다더라, 누구는 수업을 받다 울고 뛰쳐나갔다더라 하는 소리에 이미 겁을 좀 먹고 있는 상태였고, 몇 개월 전만 해도 길 건너 회사 직원으로 그 이름만으로도 내겐 유명인과 지척 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편으론 다른 떨림이 있었다. 이미 한 달여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숙지가 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뉴스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장르가 내게 맞는지부터 온통 의문 투성이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 당시

그렇게 손석희 선배와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좁다란 방의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선배는 간단하게 질문을 던지셨다. "뉴스 리딩은 다른 사람들이 가르칠 테고, 내 수업은 인터뷰니까, 너희 둘 인터뷰가 뭐야?" 솔직히 그렇게 두서없고 갑작스러운 질문이 있을까. 동기와 둘이서 동문서답을 하고 있을 때쯤 "인터뷰는 묻는 게 아니고 듣는 거야, 들으려고 그 사람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고, 다만, 질문을 하고 듣는데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준비된 것을 다 버리더라도 꼼꼼하게 짚고 넘어가야 해. 이게 내 수업의 전부야. 자! 이제, 인터뷰란 뭐라고?" "네, 묻는 게 아니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배는 웃으며 "잘 배웠네,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을 맡던 죽을 듯이 열심히 해, 매일 열심히 해야 살아남아"라는 말을 남기시며 짧은 수업을 마쳤다. 내가 대한민국 최고의 앵커인 손석희 선배에게 배운 것은 '인터뷰란 묻는 것이 아닌 듣는 것이란 것과 무엇이든 죽을 듯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경선후보 TV토론회 당시

2018년 4월, 서울시장 경선이 한창일 때 내가 대변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캠프의 우상호 후보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경선후보들의 토론회를 위해 손석희 선배께서 보도부문 사장으로 계신 JTBC를 방문했다. 그날 토론회의 사회는 '정치부 회의'라는 프로그램 진행자인 이상복 기자가 맡았기에 손 선배를 직접 뵙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실 대변인으로서 토론회를 준비하며 생긴 긴장감보다 회사를 나와 이렇게 정치판에 서게 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생각에 혹시나 만나게 될까 싶어 생긴 긴장감이 더했다. "아이고 잘 계셨습니까?" 분장실에서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우상호 의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예 잘 계셨지요?" 손석희 선배였다. 그리곤 갑자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네가 여기 왜 있지?"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를 들킨 느낌이랄까. "아 저희 캠프 대변인으로 영입했습니다." 순간 우상호 의원의 대답에 답변할 기회도 없었지만, 솔직히 어떤 대답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토론회를 잘 마치고 캠프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15년 전 선배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이든 죽을 듯 최선을 다해라'


거울나라 앨리스

"계속 뛰는데 왜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나요?"라고 앨리스가 헐떡거리며 뛰고 있는 붉은 여왕에게 묻는다. "여기선 힘껏 달려봐야 제자리야. 나무에서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해." 


영국의 수학자이자 동화작가인 루이스 캐럴(Lewis Carrol)의 소설보다 요즘엔 영화로 더 알려진 디즈니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나라의 앨리스(원제 Alice Through the Looking Glass)'에서 붉은 여왕(Red Queen)과 앨리스가 숲 속을 뛸 때 여왕이 이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왜 숲을 벗어나지 못하냐는 앨리스를 향해, '이 숲은 함께 뛰기 때문에 이 나무 숲을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최근 '도깨비', '시그널', '미스터 선샤인' 등 연달아 히트 드라마를 내놓고 있는 '스튜디오드래곤'이라는 회사가 있다. 2016년까지만 해도 CJ E&M의 사업본부에 지나지 않았던 이 곳은 현재 코스닥시장 시가총액 8위(약 2조 8천 억 원)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이에 반해 지상파 드라마는 BEP(Break-even point, 손익분기점)을 넘기도 어려워진 데다 시청률마저 '스튜디오드래곤'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를 쫓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청 환경과 패턴이라는 숲은 계속 변화하는데 제작 환경과 방법을 고전적으로 가져가며 환경에 맞는 속도를 못 내다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아나운서 조직에서도 곧잘 보이는데,  바로 뉴스 리딩에도 트렌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배 아나운서들의 낭독 방법과 후배들의 그것이 끊어읽기나 억양(Intonation) 등에서 차이가 현격히 발생되고있다. 선배들의 방식이 주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끊어주고, 어미를 낮추는 공식을 갖추고 있다면, 후배들은 '전달'에 더 중점을 두며 자연스러운 낭독으로 개성이 잘 표현된다는 것이다. 언어는 습관이라 한 번 몸에 배면 쉽게 고치기 어렵다. 이런 어려움은 아나운서들이라고 피해갈 수 없다. 특히 표준어와 사람들의 억양들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민없이 방송을 하게되면 한계가 쉽게 드러나게 된다.


약 15년 전 중국의 연변자치주에 들렀을 때다. '우리말나들이' 북한말 편을 녹화하기 위해 찾은 그곳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목격되었는데, 젊은 층과 중.장년층의 말투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중.장년층이 대체로 평야의 보통어(문화어)를 바탕에 두고 있는 반면, 젊은 층들은 서울말을 쓰고 있었다. 당시 연변대학교 조선어학과 교수와의 만남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제자리에 멈춰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뒤쪽으로 이동해 버리고(도태되어 버리고), 그 자리에 멈춰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기묘한 법칙이 곳곳에 존재하는데, 이는 주변의 물체가 움직이면 주변의 세계도 같이 연동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죽어라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시카고 대학교 진화학자인 밴 베일론(Van Valen)은 '붉은 여왕 효과, Red Queen Effect'라고 이름 짓기도 했는데, 이는 오직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것'을 일컫는다.


'어떻게 하면 좋은 연설을 할 수 있을까요?'로 시작하는 이 질문의 대답을 위해 1) 나설 용기 2) '전달'하려는 마음가짐(연기) 3) 스피치의 구성(레토릭)을 이야기했고, 방법론적으로는 1) 복식호흡 2) 시선처리 3) 손처리 3) 발성 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바꾸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실행하는 단계에서 행하는 '최선'은 담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스피치에 무슨 최선이 있을까 싶겠지만, 다루는 주제, 청중도 늘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간혹 스피치 강사나 강사 초청을 많이 받는 분들은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소재의 고갈과 청중의 변화에 늘 긴장한다. 이번 연설이 좋았다고 해서 다음 연설을 같은 방식으로 소화하려 하면 늘 위기를 맞는다. 때문에 청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스피치를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에 평소 소홀해서는 안된다.


매일이 반복되는 타임루프(Time loop)를 주제로 다룬 많은 영화 중 2017년 개봉한 Happy Death Day는 매일 방탕한 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생일 당일 살인마에게 쫓기며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공포영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지는 못할 것 같지만, 여기서 주는 메시지는 오히려 '지금에 최선을 다하라'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키스를 하는 주인공의 방문이 닫히고 방문에 붙은 스티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오늘은 당신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Happy Death Day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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