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4시 20분입니다.”
액정을 터치하자, 스마트폰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40분 후면 알람이 울릴 것이었다. 아내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곤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 나왔다. 아내는 잠귀가 밝았다. 조심하지 않으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릴 수 있었다.
싱크대를 손으로 훑었다. 컵이 만져졌다. 찬장에서 티스푼과 믹스 커피 한 봉지를 꺼냈다.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커피를 뜯은 후 컵에 부었다. ‘누가 보면 도둑인 줄 알겠네.’ 쓰게 웃으며, 컵을 정수기에 가져다댔다. 뜨거운 물을 3초 동안 받았다. 이 정도 양이 딱 적당했다. 창문을 열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얼굴을 확 덮어 왔다. 팔을 창밖으로 한껏 내뻗었다. 하나, 둘, 셋, 넷, 느리게 숫자를 셌다.
“다행이다. 비가 안 와!”
살갗에 와 닿는 빗방울이 없었다.
“다행은 무슨⋯. 에어컨 틀고 창문 열지 말랬지?”
오, 마이 갓! 사자가 깨 버렸다.
“많이 시끄러웠어?”
“줄곧 깨 있었어.”
‘괜히 살금살금 다녔잖아!’, 믹스 커피를 버리고, 커피머신을 작동시켰다. 원두가 경쾌하게 갈렸다. 거실과 방에 불을 켰다. 그리고 아내를 안아서 휠체어에 앉혔다. 아내가 효자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다가왔다.
“왜, 왜 그래?”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아!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어.’ 그녀는 효자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커피 봉지를 주워 올렸다. 이런 식으로, 아내는 효자손을 자유자재로 다루곤 했다. 불편한 손발을 대신해 주는 진짜 ‘효자’ 같은 효자손이었다.
전날 밤에 다 싸 놓은 짐이지만, 혹시 빠진 게 없는지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러는 동안, 아침 해가 높이 솟았다.
캐리어는 내가 끌었고 백팩은 휠체어에 걸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작은 가방은 아내의 몫이었다. 나는 캐리어를 끌지 않는 손으로 휠체어를 잡고 걸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와 같았다. 한동안 떠나 있을 집을 마지막으로 살펴본 후 밖으로 나갔다. 전날 예약해 놓은 대로 여덟 시 정각에 택시(전동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큰 차. 서울시에서 운영한다)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여행 가시나 봐요?” 기사님이 물었고,
“네, 영국에 가요.”
차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끄럽게도 나는 택시에 타자마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여행길에 올랐다는 감격 때문은 아니고, 안약을 넣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열두 시간마다 두 개의 안약을 넣어야 하고 스물네 시간마다 세 번째 안약을 다시 넣어야 한다. 매일매일 시간에 맞춰 약을 넣지 않으면 안압이 급속도로 오른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안약을 챙긴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안약 때문에 하루에도 다섯 번을 운다.
평일 아침 시간답게 도로는 출근하는 차들로 꽤나 혼잡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택시 안에서 평소라면 조급증을 느꼈을 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급할 것 없잖아! 곧 비행기 안에서 열두 시간을 갇혀 있을 건데 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로를 매운 차들의 엔진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아내가 스마트폰 액정을 터치해 대는 소리(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들을 들으며 나는 잠시 졸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현관문을 잠갔나? 선풍기는 껐을까? 컴퓨터는 껐고? 컴퓨터를 켜긴 했던가? 하는 두서없는 의심들, 밑도 끝도 없는 불안들이 몰려들어 소스라쳤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문 잠갔지?”
“문? 안 잠갔어?”
“선풍기 껐지?”
“끄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쩌지?”
“집이 홀라당 불타면 어떡하지? 우리 난민 되는 거 아니야?”
아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꾸했다.
“난민으로 살기에 영국이 좋을까, 프랑스가 좋을까?”
내가 말했다. 아내가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두 마디의 신소리를 더 했던 듯싶다.
그러는 동안 거짓말처럼 마음이 진정됐다. 열로 열을 몰아내는 것처럼, 산불이 나면 맞불을 놓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는 건 차가운 사실 따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마음을 기댄 채, 우리는 샴쌍둥이처럼 여행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