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광풍의 시대에 보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꾸며낸 이야기 하나.
모든 병을 막아주는 백신이 개발되었다. 한 통을 사면 죽을 때까지 조금씩 나눠 맞으며 살 수 있다. 그런데 등급이 있다는 것이 흠이다. 최상급은 모든 질병에 통한다. 그 밑 단계는 대형 질병을 막아주지만 감기 정도는 걸린다. 그 아래 등급은 가끔 열병에 걸릴 수도 있고 근육이 약해질 수도 있다. 등급마다 조금씩 기능이 떨어진다.
더 큰 문제는 가격. 워낙 비싸다 보니 아무나 살 수가 없다. 한 병만으로 평생 맞을 수 있지만 부자들은 혹시 모른다며 몇 병씩 사 모은다. 어떤 자들은 수십 병, 수백 병을 구매하기도 한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부자들에게서 한 번 맞을 분량을 주사기로 산다. 약효가 그리 길지 않아 2년에 한 번씩은 맞아야 한다. 그나마 그 가격도 계속 오른다. 언론에서는 가격이 더 오를 테니 대출을 받아 아예 한 통을 사라고 부추긴다. 서민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정부가 가격 인상을 막겠다고 나서고, 세금을 올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백신을 확보한 이들은 자본주의 세상에 내 돈으로 사는데 뭐가 문제냐고 난리다. 자기만 맞으면 끝인 한 병만 겨우 가진 사람들이 가격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한다. 백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니 더 만들라고 한다. 다시 만든다. 그런데 구할 수가 없단다. 그 많은 백신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도 부동산 대책으로 난리인 현실에 빗대 꾸며낸 이야기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백신과 집이 같으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이윤의 대상이지만 끊임없이 열악한 잠자리를 옮겨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하면서 고단한 육체를 쉬어야 할 주거공간마저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분명 잘못되었다. 자본주의라는 네 글자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아니다. 공급 확대라는 미명 하에 그린벨트 해제까지 만지작거리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윤 앞에 자연과 환경이라는 가치는 그저 액세서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1960년대 일본 신도시 개발 과정을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는 듯한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다시 보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동화적 지브리에만 익숙해 있다가, 다카하타 이사오의 현실 감각과 해학이 묻은 지브리를 보여주어 신선했던 작품이다. 오래전엔 인간이란 생물의 무지막지함, 혹은 이해할 수 없음, 욕망을 보여준다고만 생각했지만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뉴타운 프로젝트'로 인하여 살던 숲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자 너구리들은 금지된 술법인 너구리 변신술을 부활시키고 인간 연구 5년 계획을 시작한다. 하지만 뉴타운 프로젝트를 멈추기엔 역부족이다. 잠시 놀라 혼비백산했던 인간들은 금세 그 사실을 잊어버렸고, 기이한 현상에 작업을 거부하는 인부들은 다음날 다른 인부들로 대체될 뿐이었다.
기다리던 원군, 전설의 너구리 3 장로가 스펙터클한 귀신 퍼레이드를 벌여보지만 장로 한 마리가 죽고 인간에게 메시지 전달은 실패한다. 강경파들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무기들을 들고 인간의 침입을 막으려고 시도했지만 결국엔 실패하고, 저항하기 위해 사용했던 변신술은 인간과 동화되어 생존하기 위한 도구로만 쓰이게 되었다. 너구리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현실의 법칙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것이다.
숲을 잃고 밀려나는 너구리를 인간으로, 개발에 열 올리는 인간을 자본으로 대치시켜 바라보아도 영화는 기막힌 싱크로를 보여준다. 세계의 모든 것을 이윤 확대라는 논리 하나로 집어삼키는 자본의 무자비함은 인간을 능가한다. 아무리 격렬하게 저항해도 그때뿐이다. 잠깐 물러나는 듯 하지만 곧바로 더 강력한 무기로 공격한다. 너구리의 저항이 오히려 환경 친화적 뉴타운 개발이라는 마케팅 수단에 이용당하고 마는 것처럼.
강경파 곤타의 인간을 없애버리자는 주장에 너구리들은 “햄버거는? 레몬티는 어쩌지?”라며 인간을 조금은 살려두자고 이야기한다. 이들은 인간의 음식에 이미 매혹당한 상태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끊어내기에는 너구리의 삶이 인간에게 너무 깊숙하게 발을 담그고 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변신술은 인간(자본)에 저항한다는 목표가 있을 뿐 인간화(자본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가르쳐주는 장치다. 인간을 내쫓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자본은 그 모든 변신 저항에 잠시 놀랄 뿐 언제든 회유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 새로 만들어질 놀이공원 원더랜드의 사장은 너구리들의 퍼레이드를 자신들이 한 일이라는 거짓말로 자신의 희생(구속)까지 놀이공원 홍보에 이용하는 자신감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가속화는 먼저 인간화가 된 여우의 조력 때문에 가능하다. 변신술에 능하지 못한 종족을 팔아넘기고 도태시켜서까지 현실의 생존과 안락을 보장받는 능글맞음은 이미 인간의 욕망과 결이 닿아있다. 길들여진 자본의 방식으로 자본에 저항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인 셈이다.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할멈 너구리의 넋두리처럼 말이다.
폰타의 물리적 저항도 시코쿠 장로의 자금 탈취도, 999세 노인의 종교적 제의도 인간(자본) 앞에서는 무장해제당할 수밖에 없는 너구리(인간)의 현실을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냉정하게 보여준다. 죽거나 다치거나 길들여진 삶이 그 종착역이다.
다만 그러함에도 길들여지지 않고 너구리의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폰츠키’라는 삶도 있다는 것을 감독은 보여준다. 강요가 아니라 존재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부족한 식량 때문에 때로 음식물 쓰레기(자본주의가 남긴 부스러기)를 뒤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세계 전체가 이미 자본주의에 의해 포획당한 상황에서 더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의 세계를 이어가는 삶의 한 가지 방법이다. 변신술로 고갈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다른 인간처럼 과도한 노동에 내몰리는 너구리와 오히려 부동산 개발에서 재미를 본 이후로 삼림개발에 나서는 뻔뻔한 너구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너구리도 있다. 누군가는 조롱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쇼츠키’처럼 함께 하러 다가올지도 모를 삶. “느긋하고 유쾌하게 깡으로 살아가며 새끼를 낳고 덧없이 죽기도 하는” 그 삶도 존재한다는 것이 너구리 대작전의 아름다운(?) 결말이다.
내일 끝나는 ‘17회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주제가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였다. 베토벤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 ‘현악사중주 16번’ 악보에 표기한 문구다. 2분의 3박자인 1주제 “솔-미-라b”에는 “그래야만 했나?(Muss es sein?)”이라는 쓰인 한마디의 악보가 있고, 이어 4분의 4박자인 2주제 “라-도-솔, 솔-시b-미”에는 “그래야만 했다!”라고 쓰인 4마디의 악보가 있다. 악보 첫머리에는 “힘들게 내린 결심(der Schwergefasste Entschluss)”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인간(자본)의 폭주가 어디에서 멈출지 알 수 없다. 저항의 에너지마저 먹어치우는 자본의 세상에 ‘변신하지 않는’ 너구리(인간)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현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세계를 살아갈 힘은 유지되지 않는다. 때로는 존재만으로 출발이 되기도 한다. 아직 인간연구계획이 완료되지 않았듯 우리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