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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뿐인숲 Mar 15. 2021

애타게 찾았던 덧없음의 시간

영화 <디그>, 그리고 허수경


    

어릴 적부터 가지고 다니던 시집 중 일부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때 뜨거워 델 것 같은 마음을 던져주었던 시는 그렇게 먼지 속에 잠들어 있다. 간혹 일 년에 한두 번 때 묻은 표지를 털어내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시인이 그리운 것인지 시가 그리운 것인지 모를 상황이 있어서인데, 그 시집들의 십 분의 일은 고인이 된 사람들의 것이다. 세상의 상처, 혹은 몸속에서 자란 독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죽은 자의 시집을 뒤적이는 것은 아직도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싶어서인가 가끔 나 자신에게 묻고는 한다.      


“잊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기록하는 존재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존재보다 약하다.”

_허수경,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中     


영화 「디그」를 보다 무덤으로 간 한 시인을 생각했다. 아프지 않기 위해 시를 쓰다 홀연히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고고학자가 된 그는 현지인과 결혼해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다. 고고학자의 길은 “시인으로서의 삶을 단련시키는 과정과 통하는 것”이며 “계속해서 시를 쓰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 했던 시인은 “거름이 될 만한 슬픔”을 우리에게 부어주고 별이 있는 곳으로 어느 날 항해를 떠나버렸다.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속울음으로 삼키며 남겨진 누군가의 무덤을 발굴하던 영화 속 주인공과 시인이 겹쳐 보인 것은, 덧없는 인생에서 무엇인가의 일부로 남고 싶어 하는 나의 속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39년.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이디스 프레티(Edith Pretty)는 영국 동부 해안지방인 서포크(Suffolk)의 서튼 후(Sutton Hoo)라는 마을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서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발굴을 준비한다. 이 작업에 무명의 발굴가 배질 브라운(Basil Brown)이 참여한다. 배질은 고고학자의 자질을 갖추었으나 12살 때 그만둔 학업으로 인해 그저 발굴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이디스 또한 런던대학교에 합격했으나 십여 년의 아버지 병간호, 결혼 등으로 넓은 집안에 무덤처럼 갇혀버린 사람이다.     


발굴을 시작했으면서도 이디스는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스스로 되묻는다. 자신도 죽음을 앞두고 있음을 직감하면서 부질없는 삶에 대한 불안을 내비친다. 하지만 배질은 애써 삶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한다.     


드디어 무덤에서 6~7세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배가 발견되고, 배 한가운데 시신을 안장한 묘실이 드러난다. 묘실에는 앵글로색슨족의 왕으로 추정되는 이의 부장품들이 대량으로 출토된다. 로마가 떠난 후 원주민 켈트족이 앵글로색슨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잉글랜드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영화에 나오는 서포크 지방에는 동 앵글리아 왕국(Kingdom of East Anglia)이 수립되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상업 활동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질의 발굴 성공은 없던 기억을 되살려주고 잉글랜드 역사를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무덤에서 발견된 오크로 만든 배는 영화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당시 사람들은 배를 따고 영혼이 안식의 세계로 항해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육신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어딘가로 흘러가 닿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도 배를 타고 항해를 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에 배만큼 훌륭한 동반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 배를 묻은 사람들에게 어떤 신념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어딘가를 항해하고 있었겠죠.”     


극적인 이야기 전개가 없는 영화는 늦은 오후의 태양빛과 지평선으로 많은 부분을 대신 이야기한다. 금빛 들녘을 가로지르는 자전거는 망원경과 많은 책을 싣고 오래전 사람들의 삶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후세 사람들의 열정을 같기도, 마치 어디론가 흘러가는 배 같기도 하다. 석양의 빛은 발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그럴싸한 암투도, 슬쩍 끼워 넣을 법한 로맨스 없이도 이 영화가 부질없는 삶과 그런 삶의 조각들로 다시 삶을 연결하는 인간의 평범함을 잘 그려내는데 기여한다.     


드디어 전쟁은 시작되고 수많은 죽음이 다가올 것임을 영화 속 주인공들도, 관객들도 예감한다. 이디스는 남겨질 아들 로버트를 위해 사촌 로리가 살아남아 줄 것을 희망한다. 공군으로 전쟁터로 떠나게 될 로리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려 붙잡아 보는 시도”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가 발굴 현장에서 찍었던 사진은 여러 사람의 어느 한 때를 붙잡는 데 성공한다. 오래전 진행된 죽음의 현장을 파헤치는 사람과 곧 닥쳐올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사람의 이러한 대비는 약한 존재인 인간을 더욱 부각함으로써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을 드러낸다.     


배질은 닥쳐온 죽음을 예감하고 오열하는 이디스를 섣불리 위로하기보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등을 토닥인다. 발굴가답게 절망하기만 해야 할 죽음이 아니라 영원의 일부로써 다시 존재할 것임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죽어요. 결국에는 죽고 부패하죠. 계속 살아갈 수 없어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인간이 최초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긴 순간부터 우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언가의 일부가 됐어요. 그러니 정말로 죽는 게 아니죠.”     


덧없는 인생을 바라보는 황혼의 시선. 말하고 싶은 무언가는 있지만 땅을 파헤치듯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자 애쓰지 않고 그냥 심장에 담아두는 사람들의 눈빛이 인상적인 영화다. 영화의 주제처럼 어디론가 흘러가는 사람들의 등을 바라보며 말없이 나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 기억하기보다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도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어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영화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이다.     


“모두 실패한단다. 매일 실패하지. 절대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있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말이야.”     


다가올 엄마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아이가 울먹이자,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세상에는 의지로는 전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며 등을 어루만진다. 받아들이는 방법을 아이도 조금씩 알아가야 한다는 걸 그는 그렇게 돌려 말한다. 무엇에 대한 성공이든, 결국 인간은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억하되 절망하지 않고 항해하는 모두가 될 수 있을까. 이번 봄에는 자주 몸이 아플 것 같다.     


“나는 그 마음이 썩기를 원한다. 오로지 몸만 남아 채취되지 않기를, 기록되지 않기를, 문서의 바깥이기를. 이것이 마음의 역사다. 그 역사의 운명 속에 내 마음의 운명을 끼워 넣으려 하는 나는 언제나 몸이 아플 것이다.”

_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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