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는여자 Feb 05. 2021

겨울잠 퍼질러 자고있는 뱀보다는 내가 부지런하지

누가 말했나 흰머리는 지혜의 상징이라고...

자다가 나와 마주 보고 있는 채로 잠이 깬 아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불쌍해 우리 엄마 너무 불쌍해"라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보드라운 손길이 좋아 눈을 감은채 빙그레 웃으며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에이그~~ 우리 엄마 정말 불쌍해. 아빠랑 싸우고, 늙어서 너무 불쌍해"

그 마음이 기특하고도, 말하면 쪼잔해질 것 같은 언짢은 기분이 든다. 

그래.. 요즘 유난히 흰머리가 빨리 자라는 기분이다. 뒤통수 깊은 곳에 흰머리가 나면 잘 가리기만 하면 되는데 나의 흰머리는 얼굴과 머리카락의 경계선을 뒤덮으며 올라온다. 내 몸 중에서 최고 자랑거리인 이마에서 귀까지 내려오는 잔머리가 온통 흰색으로 변하고 있다. 높은 포니테일로 그 잔머리와, 두 번째 자랑거리인 뒤통수를 마음껏 드러내지 못한 게 2년째 접어든다. 

누군가에게 흰머리는 지혜의 상징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지금 내게 흰머리는 가정불화로 인한 마음고생과, 불안감의 상징이다. 



자신의 생일 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파티 장식을 당당히 요구하는 아이에게 많이 화가 났다. 파티용품을 사고,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초대하여 시간을 조율하는 내내 그랬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충분히 힘든데 도대체 내가 얼마나 더 해야 해!! 얼마나!!! 난 이런 걸 받아보지도 못했다고.'

이번 내면의 소리는 좀 강력하고, 많이 거칠어 자꾸 삐져 자꾸 마음에서 삐져나온다. 

"친구들 초대하는 이런 파티 엄만 너무 힘들어! 앞으론 절대 못해!"

"엄만 할머니가 이런 거 안 해줬어?" 아들이 물어봤다.

그러게..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의 어린 시절 생일은 어땠는지. 이렇게 단 한 컷도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정말 큰 케이크에 하얀 버터크림과 설탕으로 만들어 달콤한 핑크색 장미꽃과 삐죽삐죽 초록색 잎으로 장식된 케이크를 분명 먹었던 것 같긴 한데 말이다. 


친구들의 생일 축하도 받고, 오늘 하루가 재미있었는지 잠자리에 누워 "엄마 오늘 정말 행복했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엄마 나를 낳아주고 길러줘서 고마워요. 아참 아빠도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셨지? 그런데 나는 좀 걱정이 많이 돼. 엄마랑 아빠가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생일파티에 기분이 한껏 좋아 이 얘기 저 얘기 떠들더니 마무리는 내가 피하고만 싶은 바로 그 얘기다. 작은 마음속에 고만한 돌덩이를 얹어준 것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가 일부러 그랬니? 나도 해결 못하는 일인데 자꾸 얘기하지 마 나도 불편하다고!!' 내면의 소리가 말했다.

"그래 네가 그런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사실 엄마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빤 아직도 엄마랑 화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가 않아. 그리고 엄마는 좀 지쳤어"

아들은 "엄마 조금만 더 버텨봐 내가 엄마가 더 버틸 수 있게 도와줄게"라고 말하며 볼에 두 번 뽀뽀를 한다.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삶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버티는 것이라는 걸


나와 같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머리는 풀어헤친 채로 수면바지를 입고 거실에서 책을 하염없이 넘기는 아이를 보았다. 

"엄마 닮아 똑똑하네~! 엄마 닮아 눈썹이 이쁘네~"라고 말하곤 하지만 지금 나의 딸이 '나와 같은 여자가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다. 

생각을 떨구려고, 또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마음속 검은 그림자를 끊어내려고 딸과 걷는다. 눈이 녹은 겨울산은 다시 황량해졌다. 눈 속에 파묻혔던 가지가지마다 그래도 봄을 준비하는 겨울눈이 제법 커져있었다.

겨울 눈을 보고 아주 심한 시기심이 올라온다. (하다 하다 내가 이젠 나무까지 질투를 하는구나!)

겨울 눈이 봄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뭘 했나? 기적을 만드는 미라클 모닝을 위해 매일 밤 맞춰놓는 알람이 울리면 잽싸게 일어나 알람을 끄고 다시 누웠다. 텅 빈 메모장에는 단 한 줄의 글도 써내려 갈 수가 없었다. 촘촘히 시간별로 나누어진 다이어리가 텅 빈 채 지나간 게 두 장이 넘는다. 이불에서 왼쪽, 오른쪽 엎드리기, 바로 눞기를 반복하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얘기하면 간신히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친구나 언니의 전화가 와 만나자고 하면 생각 없이 만나서 시간을 보냈고, 헤어져 내내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로 저녁 준비를 하면 노래를 부르면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다. 부작용이 있긴 한데 그것은 술이 서서히 깬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저녁 시간마다 아이들과 함께 하던 모든 루틴을 무시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12시가 될 때까지 넷플릭스로 미드를 보고 졸다가 잠이 든다. 그렇지만 이른 시간 알람을 맞추는 것은 잊지 않았다. 매일 밤 다짐한다. "내일은 나로 돌아가자" 

그래도 겨울잠을 퍼질러 자고 있는 뱀보다는 내가 낫지...


작가의 이전글 못난 사람의 못난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