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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Feb 08. 2021

침묵을 깨기 위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아이들과 나 사이에는 있고, 남편과 나 사이에는 없는 것을 찾았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관계

아이들과 걷는 길은 호흡이 척척 맞는 팀원과 함께 일을 하는 것과도 같은 날도 있다.

가끔 보고 싶은 장면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아이들이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못해도, 조금 빠른 걸음으로 배려하지 못해도, 약간의 힘든 코스를 만날 때 격려해줄 힘이 없어도 큰 배려를 해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자기 앞의 길을 걸었다.

내가 거친 나무껍질을 맨손으로 쓱쓱 쓰다듬을 땐(뭐하느냐고 물어보지 않고) "나도 자연의 에너지를 충전할 거야" 하고 장난을 쳤고,  

내가 나무의 겨울눈이나, 저마다의 규칙으로 뻗어나간 가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이제 새 잎이 나오니까 꺾으면 안 돼"라고 경고를 해주었다. 


내가 잠시 쉬며 물을 마실 땐 옆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표정과 행동을 꾸지미 않고, 불편을 끼칠까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한번 더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걷다가 방귀가 나오면 뿡~!! 하고 시원하게 뀌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입을 다물면 된다.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이런 편안한 사람이 단 한 명만 있다면 삶은 외롭지도,  피곤하지도 않은, 그러니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순간을 즐길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황량한(황량해 보이는) 땅을 꾹꾹 밟으며 걸음을 옮긴다. "어 이건 보라색 열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열매의 흔적도 없는 나무를 붙잡고 얘기를 한다. "아! 저 나무엔 작은 하얀 꽃들이 많이 피었던 것 같아!" 역시 마른 잎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들은 황량한 숲에서도 봄꽃을 그리고, 가을의 열매가 열릴 것을 믿고 있다. 믿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아주 당연하게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것. 엄마가 나를 사랑함을 알고, 내가 배고프거나 힘들 때 도와줄 것을 당연하게 아는 것, 그런 믿음이 우리를 최고로 편안한 관계로 만들어준 걸까? 심증은 있지만 증명해낼 방법이 없다.  

"먹을 것 좀 주세요" 배가 고플 것을 대비해 딸기잼 비스킷을 챙겼을 거라고 당연하게 믿은 아이들이 말했다. 서쪽으로 기울어진 해를 가려 응달진 길에는 밤을 준비하는 새소리와 아이들이 비스킷을 먹으며 기분 좋아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함께 들려왔다. 

누군가 나를 믿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책임감, 자신감, 사랑 

현 남편과 나 사이에 없었던 것도 이것이구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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