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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Feb 18. 2021

삶을 살아낸 흔적

아빠의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잠이 오지 않는다.


#아빠의 침대

'멋'내는 것을 좋아하던 아빠는 늘 흰머리가 보이지 않게 염색을 했었는데 지금 너무나 하얀 아빠의 백발은 언제 검은 머리가 난 적이 있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아빠의 침대에 누운 그날 밤은 잠이 오질 않았다. 모로 누웠다 바로 누웠다를 반복하는 사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갔는데 그렇게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니 아빠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섭섭한 마음, 미안한 마음, 손자 손녀에 대한 그리움... 

너무 아파 더 이상 누워있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나 나와 앉았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왔다.


#험악한 거리를 걸었다.

나는 하필 딸과 그 거리를 지나간다. 먼발치에서 외출했다 돌아오는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에 교차한다. 재개발을 앞두고 곧 근사한 아파트가 들어설 낡은 골목은 아무렇게나 쓰레기가 널려있었고 유리는 깨져있었다. 종종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은 깨끗한 건물에도 어김없이 철거를 알리는 빨간 락카 표시가 되어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폐기물이 될 운명이었다. 이곳도 추억이 될 수 있을까? 평범한 동네가 재개발이 되고 10억이 넘는 고층의 고가의 아파트가 들어설 거리를 걷고 있자니 난대 없이 패배감이 올라온다. 

'철거예정' 길 하나 사이로 재개발 구역에 들지 못한 곳에는 더 낡은 건물도 많았는데 운명처럼 이곳과 저곳은 전혀 다른 처지가 될 것이다. 그저 운명이 그렇다고 한다면 왜 삶은 공평하지 않은 건지 운명이 원망스럽고, 능력과 노력에 달린 거였다고 한다면 이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았어야 했냐고 원망스러울 것이다. 난 지금 삶의 게임에서 지고 있는 걸까? 아빠는 삶의 게임에서 졌을까?

'아빠 최선을 다해 살아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나는 따뜻한 집에서 잘 먹으며 철없이 컸어요. 아빠는 정말 잘 살았어요. 사랑해요. 미안해요.' 마스크 안에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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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낸 흔적을 가지고 만났다.

사느라 바빠서, 멀어서, 아이 키우느라 못 만났던 사람들을 시간 내고 마음 내어 만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불편해 차를 빌렸고, 낯선 길을 운전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제한속도 무려 100Km 고속화도로를 달렸고(옆 차가 지나가면 차가 휘청한다!!) 한강을 옆에 두고 자유로로 향하는 회전 길도 두어 개를 지나야 했다. 아이들 둘은 나를 믿는 건지 차에서 과자를 먹으며 장난을 치며 한강을 구경했고, 나는 책임감에 눈을 부릅뜨고 운전대를 꽉 잡았다. 등과 손에서 식은땀이 났지만 멈출 수도 없고, 무조건 목적지를 향해 가야만 했다. 도전이 끝나고 드디어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함께했던 우리. 언니의 얼굴엔 주름도, 얼룩도 있었는데 머리는 염색하지 않으면 반 백이라며 깔깔거렸다. 예쁘기만 했던 언니의 얼굴엔 행복도 있었지만 고단함도 보였다. 

각자의 기억들 속에 추억을 회상하는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감상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만남과 대화들은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에 범벅이 되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린 따뜻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함께 보냈다. 

우리는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약도 없는 제주여행을 약속하고 잘 살아왔다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서로를 응원하며 헤어지는 길에는 또 눈물이 난다. 

각자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낸 흔적들을 가지고 우린 다시 만나게 되겠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언니가 준 하얀 봉투를 만지작 거린다. 염색은 미용실이 비싸서 집에서 한다는 언니의 말이 생각난다. 

깜깜한 차에서 조잘대던 아이들이 눈을 감으며 스르륵 머리를 기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고, 이번엔 어두운 밤이다. 그래 꼭 엄마가 잘 해낼게. 다시 눈을 부릅떴고, 운전대를 꽉 쥐었다. 


속도위반도 하지 않았고, 잠시 길을 잘못 들어 유턴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접촉사고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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