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인식의 첫 시작은 감각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글을 읽기 전에, 세계를 읽을 수 있을까요? 인식의 첫 시작은 감각에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첫 문장에서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하며, 그 증거는 감각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문해력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언어 이전의 세계에서 우리는 '보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감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모든 배움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갓난아기는 울음이라는 유일한 언어로 세상에 호소합니다. 그리고 점차 울음소리를 분화시켜 배고픔, 불편함, 두려움을 구별하여 표현하며 양육자와 소통합니다. 감각으로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감각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발달의 문제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세상을 배워나가는 방법은 바로 '감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문해력을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만 정의합니다. 이는 언어를 획득하고 지성을 발휘하는 단계의 능력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감각의 정신작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감각 없이는 언어도, 사고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글을 읽기 전에, 세계를 읽을 수 있는가?
단어를 이해하기 전에, 대상을 느낄 수 있는가?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
이 질문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미술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 이전에는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에워싼 이 세계를 말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든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존 버거는 미술비평가답게 시각적 문해(Visual Literacy)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우선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기들은 언어를 획득하기 이전에 감각으로 세상을 인지합니다. 감각이 닫힌 아이는 언어도 닫힙니다. 시각·청각·촉각이 무뎌진 아이는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유를 읽지 못하며, 감정의 결을 놓칩니다.
우리의 언어에는 감각을 통해 태어난 표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따뜻한 말', '차가운 시선', '날카로운 목소리', '부드러운 분위기', '쓴 경험', '달콤한 승리'... 이 모든 언어는 감각의 경험에서 비롯된 은유입니다. 만약 감각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에게 이런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
이 지점에서 시각적 문해력은 단순한 '보는 것(seeing)'을 넘어, '읽기(reading)'의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그것은 대상을 수동적으로 인지하는 것을 넘어, 이미지에 내재된 맥락과 구조, 그리고 의도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더 나아가, 시각적 문해력은 '생성적' 능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시각적 경험을 정교하게 다듬는 훈련은, 곧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은유를 창조할 수 있는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일입니다. 이미지가 텍스트를 압도하는 현대 사회에서, 시각적 문해력은 단순히 예술을 즐기는 교양을 넘어, 세계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핵심 도구입니다.
이 '이미지 읽기' 훈련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이 바로 존 데비스(John L. Debes)입니다. 1960년대, 그는 텔레비전과 잡지 사진이 세상을 뒤덮는 것을 보며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왜 글은 '문해력(Literacy)'이라 부르며 열심히 배우면서, 이미지를 읽는 법은 배우지 않는가?"
그는 이미지를 읽는 능력 또한 글자처럼 '학습'될 수 있는 기술임을 역설하며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이라는 용어를 공식화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읽기'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를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학자가 바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입니다.
바르트는 "이미지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떻게 교묘하게 말을 거는지, 그 '수사학'을 파헤쳤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통찰을 명품 시계 광고에 적용해 보면 그 의미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우리가 잡지나 고급 쇼핑몰 웹사이트에서 마주하는 명품 시계 광고를 떠올려봅시다. 우선 명시적 의미(Denotation), 즉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완벽하게 재단된 슈트나 턱시도를 입은 남성의 손목일 것입니다. 그 손목에는 정교한 기계식 시계가 빛나고 있습니다. 배경은 고풍스러운 서재이거나, 클래식한 요트의 갑판, 혹은 최고급 스포츠카의 운전대일 수도 있습니다. 사진의 조명은 부드럽고 깊이감이 있으며, 인물의 표정은 시간을 초월한 듯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이것은 그저 '시계와 사람, 그리고 배경'이라는 사실의 목록입니다.
하지만 이 광고가 우리에게 진짜로 '판매'하려는 것은 이 표면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바로 함축적 의미(Connotation), 즉 이 시각적 요소들이 우리 문화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숨겨진 연상입니다. 이 모든 장치(정장, 요트, 여유로운 표정)는 하나의 강력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만들어냅니다. 이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가 아니라, '성공'의 증표입니다. 그것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세련된 취향'을 상징합니다.
광고 문구 역시 "정확합니다" 혹은 "가볍습니다"라고 기능적인 장점을 말하는 대신, "세대를 이어온 전통(Heritage)"이나 "당신의 성취를 기념하며", "소수에게만 허락된 가치"라고 속삭입니다. 롤랑 바르트의 시각에서 볼 때, 이 광고는 '시계'라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공한 엘리트 집단으로의 소속감', '불변하는 가치', '가문의 유산'이라는 사회적 '신화(Myth)'를 판매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각적 문해력이란, 바로 이처럼 상품의 표면을 꿰뚫고 우리에게 주입되는 이 '신화'의 정체를 읽어내는 능력입니다.
바르트의 통찰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합니다. 광고나 뉴스는 바로 이 두 번째 층을 이용해, 특정한 '가치관'이나 '신화'를 '당연한 사실'처럼 우리에게 판매합니다. 결국 바르트가 말한 '읽기'란, 이미지의 표면을 꿰뚫어 보고 그 뒤에 숨어있는 "누가, 왜, 어떤 의도로 이 메시지를 만들었는가?"를 간파하는 비판적 행위입니다. 이는 무뎌진 감각으로 '은유를 읽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이미지라는 언어의 '숨은 은유'를 읽어내는 가장 고등한 사유 활동입니다. 작금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시각적 문해력이 필요합니다.
보는 법을 잃은 사람들
현대 교육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먼저 가르칩니다. 아이들에게 색을 가르친다고 해볼까요? '파란색'은 무지개에서의 한 부분이고, 모든 파란색 계통의 색채들을 묶는 범주입니다. 하지만 '파란색'은 하나의 정보일 뿐 감각적인 경험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Blue Period)가 품고 있는 '우울한 색'과, 이브 클랭(Yves Klein)이 특허까지 낸 그 비물질적인 파랑(IKB)이 망막에 불러일으키는 '아찔한 울림'이 어떻게 다른지는 묻지 않습니다.
감정도 그렇습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라벨'을 붙이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벅찬 안도감 사이로 문득 솟아오르는 '죄책감 섞인 슬픔'이나,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찾아오는 '고요한 슬픔'의 복잡한 질감을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적 경험, 즉 시각적 문해력(Visual Literacy)이 사유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세계를 '경험'하도록 허락하기 전에, 그것을 이미 해석이 끝난 '개념'으로 박제해 버립니다. 우리는 유동적인 세계의 현상을 살아있는 눈으로 포착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그 현상에 미리 정해진 '정답'의 이름표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보는' 법을 잃어버리고 '암기'하기 시작합니다.
어린이의 눈으로 돌아가기
피카소는 "어린이처럼 그리는 데 평생이 걸렸다"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화가가 평생을 바쳐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개념과 기술을 배우기 이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던 어린 시절의 순수한 시선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하늘을 '파랗다'라고 배우기 전에 하늘을 봅니다. 꽃을 '예쁘다'라고 판단하기 전에 꽃을 만집니다. 개념이 감각을 지배하기 전, 그들은 세계와 직접 만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을 받고 언어를 습득하면서 이 능력을 잃어갑니다. '아는 것'이 '보는 것'을 대신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피카소가 평생을 걸쳐 되찾고자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이 '태초의 사유'가 아닐까요? 개념의 틀이 씌워지기 전, 언어의 감옥에 갇히기 전, 세계를 날것 그대로 감각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문해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더 많은 개념과 정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념을 배우기 전의 순수한 감각, 판단하기 전의 생생한 경험, 이름 붙이기 전의 직접적인 만남. 그것이 모든 창조와 사고의 근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로 돌아가야 합니다. 태초의 사유로, 어린이의 눈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문해력이 시작됩니다.
AI 시대, 인간 고유의 보는 법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우리는 이미 말해진 것들 속에서 세계를 보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배운 '개념'과 '언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사실 '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AI, 특히 거대 언어 모델(LLM)은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말해진 것들' 속에서만 세계를 학습합니다. AI는 방대한 텍스트와 이미지 데이터의 패턴을 학습하여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보는 척'(판단)하는 방식의 정점에 서 있습니다. AI에게는 '꽃'의 향기를 직접 맡거나 그 촉감을 느껴본 '몸'도, '경험'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인간마저 AI처럼 '이미 학습된 개념'과 '말해진 것들' 속에서만 세상을 본다면, 우리는 과연 AI와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AI가 할 수 없는 '직접 보는 힘'을 스스로 포기한 채, AI의 방식을 흉내 내는 존재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AI 시대의 새로운 문해력'이란, AI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능력, 즉 개념의 틀을 깨고 세상을 '직접 보는 힘', 언어 이전의 '몸으로 겪어내는 생생한 경험'을 회복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AI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AI와 지식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보는 법'을 되찾고 인간 고유의 감각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는 힘
제14회 창비 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수상작, 문봄 작가의 시 '컵라면 뚜껑'을 보겠습니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나서
김이 새어 나가지 않게
용기를 덮어주는 단 3분
한 번 두 번 접어
라면을 덜어 먹는 그릇이 되기도 해
항아리 뚜껑이 대신할 순 없잖아
이 짧은 시에는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생명 없는 사물들을 시의 주체로 등장시켰고, 연민과 공감 능력이 대상의 이면을 파고드는 힘으로 연결됐다"는 평을 했습니다. 컵라면 뚜껑에 대해서 우리는 관찰하지 않았습니다. 필요가 다하면 즉시 쓰레기통으로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감각적인 관찰을 통해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진정한 창조자는 가장 평범하고 비루한 것들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찾아낸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창조의 첫 단추가 바로 관찰입니다. 이는 20세기 문학과 현대미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심지어 하찮게 여겨지던 것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바로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1917)입니다.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기능적이며 심지어 '비루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기성품(ready-made)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것은 예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뒤샹이 이 오브제에 어떤 미학적 변형이나 수공예적 솜씨를 거의 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찰흙으로 변기를 빚지 않았고, 캔버스에 변기를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그것을 '선택'하고, 'R. Mutt'라는 가상의 서명을 한 뒤, 예술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에 '배치'했을 뿐입니다. 이 단순한 행위는 그 이전까지 예술계를 지배하던 회화 중심의 관습적 언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당시의 예술, 특히 회화는 '아름다운 것을', '작가의 손기술로',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강력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뒤샹은 "예술은 '무엇을' 만드느냐가 아니라, '어떤 관점'을 제시하느냐의 문제"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의 '관찰'은 사물의 외형을 보는 것을 넘어섰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가?'라는 예술의 시스템 자체를 꿰뚫어 본 것입니다. 가장 평범한 변기 하나를 통해, 그는 손으로 그리는 기술 중심의 전통 예술이 아닌, 아이디어와 개념 중심의 새로운 예술, 즉 현대미술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컵라면 뚜껑을 시의 주인공으로 삼은 문봄 작가와 소변기를 예술로 제시한 뒤샹은 같은 맥락에 서 있습니다. 둘 다 우리가 '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고, '가치 없다고 여겼던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관찰의 힘이며, 진정한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관(觀), 진정으로 보는 법
여기서 우리는 본다는 관(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손을 그린다고 해봅시다.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을 보고,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왼손은 하나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왼손에 집중하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른쪽 뇌로 그리기』의 저자 베티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지손가락을 그리고 싶다면 엄지손가락 주변의 공간을 그리세요." 왼손을 그릴 때 대상에서 벗어나 그 여백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이는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입니다.
화가 파울 클레는 "미술은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단지 미술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학, 음악, 문학 등 모든 분야에 통하는 진리입니다. 관찰력이 뛰어난 의사는 환자의 안색만 봐도 질병의 상태를 간파합니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통해 대상의 정수를 잡아내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미술활동을 절대적으로 권합니다. 미술교육의 핵심은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바로 '관찰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 중 한 명이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입니다. 그의 스승 외젠 들라크루아는 폭발적인 관찰력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5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바닥에 닿기 전에
그를 그려내지 못하면 걸작을 남길 수 없다."
이는 과장이 아니라, 관찰의 본질을 꿰뚫는 말입니다. 순간을 포착하는 힘, 본질을 간파하는 눈, 그것이 바로 진정한 관찰입니다. 예리한 관찰은 문해력의 해(解)에 해당합니다. 그 속에서 소의 뿔을 해체하는 칼(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예리하고 섬세해야 합니다. 그 칼을 갈고닦는 것, 그것이 바로 관찰력을 키우는 훈련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볼까요?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의 저서 『오륜서』에서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보는 눈'을 명확히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켄(見)'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관(觀)'의 눈입니다. 켄(見, Ken)의 눈은 '표면을 보는 눈'입니다. 상대방의 칼, 손, 발 등 특정 부위나 기술의 겉모습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무사시는 이것은 상대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며, 여기에 집착하면 속임수에 넘어가고 전체의 흐름을 놓친다고 강력히 경고합니다. 반면, 관(觀, Kan)의 눈은 '본질을 보는 눈'으로 의식적인 '관찰'이며, 상대의 특정 부위가 아닌 상대 전체의 기세, 마음(心), 그리고 주변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무사시는 이 '관(觀)의 눈'을 통해 곧 닥칠 공격을 예측하고,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를 감지했습니다. 이는 대상을 고정된 '이름(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흐름(의도)'으로 관찰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궁극의 통찰입니다.
독서에서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다가 단어에 집중한 나머지 주변의 문장과 단락을 못 봅니다. 맥락을 잃게 되는 것이죠. 진정으로 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감각적으로 봐야 합니다. 글로 쓸 수 없는 것은 마음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관찰입니다.
감각적 문해력, 인간의 첫 번째 언어
그렇다면 감각적 문해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계를 개념이 아니라 경험으로 만나는 능력입니다. 이름 붙이기 전에 느끼고, 판단하기 전에 감지하고, 설명하기 전에 머무는 능력입니다. 감각적 문해력은 유동적 사고의 전제입니다. 고정된 개념에 갇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사고하는 능력은 감각의 민첩성에서 시작됩니다. 같은 소리를 들어도 맥락에 따라 다르게 듣고, 같은 표정을 봐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는 능력. 그것이 바로 감각적 문해력입니다.
또한 감각적 문해력은 인간의 첫 번째 언어입니다. 아기는 말을 배우기 전에 감각으로 세계를 읽습니다. 엄마의 목소리 톤으로 안전함을 느끼고, 표정으로 감정을 읽고, 촉감으로 애정을 감지합니다. 이것이 모든 문해력의 출발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에게 진정한 문해력을 선물하고 싶다면,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는 세계를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세계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의 '관찰의 힘'을 훈련할 수 있을까요? 다섯 가지 실천적인 방법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로는 대상의 이력서를 쓰는 것입니다. 가치를 재발견하는 관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트라빈스키가 "평범하고 비루한 것"에서 가치를 찾았듯이, 우리 주변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대상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보는 훈련입니다. 교실이나 집에서 가장 평범한 대상 하나를 선택합니다. 압정, 분필 한 조각, 창문 잠금쇠, 리모컨 건전지 뚜껑처럼 우리가 의식조차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친하지 않은 친구도 좋습니다. 학교 앞을 배회하는 고양이는 어떨까요? 그리고 그 대상의 이력서를 작성합니다. 양식은 없습니다. 자유롭게 써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항목들을 써볼 수 있습니다: 이름(별명 포함), 재질과 외모, 경력(어디서 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 특별한 능력(무엇을 할 수 있는지), 관계(주로 누구와 함께 있는지), 미래의 꿈 등등. 무한한 관찰을 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던 대상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그 존재 이유와 특성을 집요하게 파고들게 됩니다. 이는 대상을 기능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보게 하는 훈련입니다. 컵라면 뚜껑을 시로 쓴 문봄 작가처럼, 평범한 것에서 비범함을 발견하는 눈이 열립니다.
두 번째는 관점을 의식적으로 비트는 것입니다. 뒤샹처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뒤샹은 변기를 90도 돌려 '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처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야 숨겨진 것이 보입니다. 먼저 거꾸로 봅니다. 익숙한 가족이나 친구의 사진을 180도 뒤집어서 봅니다. 뇌는 '눈' '코' '입'이라는 '개념'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선과 형태, 명암의 덩어리로만 보게 됩니다. 다음은 접사로 봅니다. 아주 가까이서 보는 것이죠. 나뭇잎이나 옷감, 피부를 돋보기로 보거나 눈을 1cm 앞까지 가져가 봅니다. '나뭇잎'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복잡한 패턴과 질감, 미세한 색의 변화만 남습니다. 우리가 '안다'라고 생각했던 자동 인식 시스템을 강제로 멈추고, 순수한 시각 정보 그 자체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보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세 번째로는 눈을 감고 그려보는 것입니다. 다른 감각을 깨우는 것이죠. 학생들은 시각에 90% 이상 의존합니다. 이를 의도적으로 차단해 봅니다. 5분간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것, 냄새 맡은 것, 피부로 느낀 것(바람, 온도, 책상의 질감)을 오직 글로만 묘사합니다. 그림으로 그려도 좋습니다. 좀 더 심화해 볼까요? 들리는 소리(친구의 목소리, 시계 소리)를 색깔이나 모양으로 표현하게 합니다. "저 목소리는 날카로운 노란색이다", "히터 소리는 뭉툭한 갈색이다"처럼 말이죠. 공감각으로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무시했던 다른 감각들이 깨어나며 세계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시각에 의존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세계를 경험합니다.
네 번째로는 윤곽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 그려보는 것이죠. 이는 미술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관찰 훈련입니다. 뇌가 "이건 손가락이야"라고 '판단'하기 전에, 눈이 '보는' 속도를 손이 따라가게 합니다. 자신의 손이나 앞에 놓인 사물을 봅니다. 연필을 든 손은 종이만 보고, 시선은 '절대' 종이를 보지 않고 오직 대상의 윤곽선만 10분간 천천히 따라갑니다. 그림은 괴상하게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상의 모든 미세한 굴곡과 변화를 평생 그렇게 집중해서 본 적이 없을 만큼 몰입하게 됩니다. '개념'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눈'이 직접 그림을 그리게 하는 최고의 훈련입니다. 베티 에드워즈가 말한 '오른쪽 뇌로 그리기'의 실천입니다.
마지막으로 금지어 게임을 해보는 것입니다. 비유로만 말하는 훈련이죠. 이는 언어의 감옥 탈출하는 연습입니다. 우리는 '사과'를 '빨갛고, 둥글고, 맛있다'는 익숙한 언어('이미 말해진 것') 속에 가둡니다. 이 관습적인 언어를 금지해야 새로운 언어가 탄생합니다. 하나의 사물(예: 지우개)을 정하고, 그 사물을 설명하되 핵심 단어들을 '금지어'로 설정합니다. 지우개라면: '지우개', '지운다', '틀린 것', '고무', '하얗다'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비유(직유, 은유)나 의인법으로만 그 사물을 설명해야 합니다. 스무고개처럼 말이죠.
"연필의 실수를 먹고사는 하얀 유령"
"실패의 무덤을 덮는 작은 눈덩이"
"종이 위를 기어가는 네모난 달팽이"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관계와 이미지를 창조하게 되며, 이는 관찰이 어떻게 새로운 언어와 창조로 연결되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방법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시한 다섯 가지 방법은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합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고, 뇌의 자동화된 판단을 멈추고, 세계를 날것 그대로 다시 만나는 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뒤샹과 스트라빈스키가 말한 '진정한 창조'의 첫 단추이며, AI 시대 새로운 문해력의 실천적 시작입니다. 우리는 글을 읽기 전에, 먼저 세계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감각을 깨우는 것. 그것이 문해력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