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새로운 문해력이 온다
"세계는 우리가 해석하기를 기다리는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다시 쓰는 텍스트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는 지금까지 아이들이 세계를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집중해왔습니다. 감각으로 세계를 만나고, 패턴을 발견하며,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문해력의 여정을 함께 따라왔습니다. 1장에서 우리는 창조하는 문해력의 철학적 기반을, 2장에서는 경계를 넘고 프레임을 깨는 탈영역화의 힘을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3장 1절부터 4절까지 우리는 문해력이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목격했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발견하고(1절), 관계 속에서 존재를 인식하며(2절), 유연한 자아로 경계를 횡단하고(3절),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을 갖추는(4절)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5절에서, 이 모든 능력이 하나로 수렴되는 지점을 탐구합니다. 바로 세계를 다시 쓰는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해석하기를 기다리는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다시 쓰는 텍스트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에 대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아이들을 오랫동안 해석자의 위치에 묶어두었습니다. 교과서에 쓰인 정답을 찾아내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며, 기존 지식을 정확히 재생산하는 능력만을 훈련시켜왔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정보의 소비자로, 의미의 수용자로, 세계의 관객으로 길러내는 교육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대체불가능한 존재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텍스트를 창조해내는 사람입니다. 세계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다시 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AI 시대에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창조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자의 탄생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1968년 발표한 「저자의 죽음」에서 혁명적 선언을 합니다. "저자의 죽음은 독자의 탄생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 속에 고정되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독자의 역할은 저자가 숨겨놓은 의미를 정확히 발굴해내는 것이었죠. 하지만 바르트는 이 위계를 전복합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가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바르트에게 텍스트는 "직조된 것(textile)"입니다. 수많은 문화적 인용들이 얽히고 설킨 다차원적 공간이며, 그 어떤 것도 원본이나 중심이 아닙니다. 독자는 이 직조된 실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따라가며 의미를 구성합니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각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독자는 단순히 의미를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를 넘어서야 합니다. 바르트의 독자는 여전히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진정한 문해력의 완성은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 것을 넘어, 새로운 텍스트를 쓰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의미의 생산자에서 세계의 창조자로 도약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의 통찰
미셸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저자-기능(author-func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저자라는 것은 텍스트를 쓴 실제 인물이 아니라,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수행되는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저자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새로운 담론을 개시할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담론의 창시자들", 즉 프로이트나 마르크스처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읽고 쓰는 가능성을 열어젖힌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책을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는 새로운 담론의 공간을 창조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을 다시 읽는 방법을 열었고,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렌즈를 통해 역사를 다시 쓰는 방법을 열었습니다. 이들은 세계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읽는 새로운 문법 자체를 창조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창조자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을 여는 것,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배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담론을 창조하는 순간
북클럽에서 만난 한 중학교 2학년 아이가 보여준 변화가 이를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이 아이는 『해리 포터』를 읽고 처음에는 "재미있었어요"라고만 말했습니다. 전형적인 소비자로서의 독서였습니다. 하지만 몇 주간의 토론을 거치며, 이 아이는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머글들은 마법사들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는데, 마법사들은 머글들의 세계에 멋대로 개입하고 기억을 지우잖아요. 이게 정당한가요? 마법사들은 자기들만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머글들에게는 알 권리조차 주지 않아요. 이건 일종의 특권 계급이 아닌가요?"
이 질문이 나왔을 때,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습니다. 누군가 "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요"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하지만 머글들이 마법을 알면 위험하지 않을까요?"라고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이 아이는 원작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 설정(마법사와 머글의 분리)에 윤리적 질문을 던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독법을 열었습니다. 단순히 텍스트의 정보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텍스트와 자신, 그리고 현실 세계의 권력 구조를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다른 아이들의 독서 방식까지 바꾸어놓았습니다. 한 아이는 "그럼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이 인간 아이들만 선택하는 것도 차별 아닌가요?"라고 물었고, 다른 아이는 "『반지의 제왕』에서 왜 중요한 결정은 항상 남자들이 하죠?"라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한 '담론의 창시자'가 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의 질문이 새로운 독법의 가능성을 열고, 다른 사람들이 그 질문을 따라 자신만의 비판적 읽기를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1984』의 재발견
또 다른 고등학생 제자가 『1984』를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빅브라더가 모든 것을 감시하는 사회가 무섭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세대는 스스로 모든 것을 공개하잖아요. SNS에 내 위치, 내 일상, 내 생각을 올리고. 오웰은 강제적 감시를 경고했지만, 자발적 감시는 예측 못 했어요. 어쩌면 지금이 더 무서운 건 아닐까요?"
이 아이는 텍스트가 쓰인 시대의 한계를 읽어내고, 그 한계 너머로 사유를 확장했습니다. 오웰의 텍스트를 21세기 디지털 사회라는 새로운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감시"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한 것입니다. 저는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오웰의 예측이 틀렸다는 거니?"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더 정확했던 것 같아요. 빅브라더가 굳이 우리를 강제로 감시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우리가 알아서 모든 걸 올리니까요. '좋아요'를 받고 싶어서, 팔로워를 늘리고 싶어서, 우리가 스스로 사생활을 포기하고 있어요. 이게 진짜 무서운 거예요. 강제가 아니라 자발이니까요."
이것은 단순히 영리한 독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텍스트를 통해 현실을 다시 읽고, 현실을 통해 텍스트를 다시 이해하는 변증법적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이는 오웰도, 기존의 평론가들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통찰을 생성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 문해력입니다. 텍스트를 출발점으로 삼되, 텍스트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주어진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던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 시작하는 능력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창조적 문해력의 실존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합니다. 노동은 생명 유지를 위한 반복적 활동입니다. 먹고, 자고, 청소하는 것처럼 끝나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환적 활동이죠. 작업은 인공적 세계를 만드는 제작 활동입니다. 집을 짓고, 도구를 만드는 것처럼 물리적 결과물을 남기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행위는 이 둘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행위는 세계에 예측 불가능한 새로움을 도입하는 것, 아렌트가 '탄생성(natality)'이라 부른 시작의 능력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아렌트에게 인간의 고유성은 바로 이 시작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던 가능성을 현실로 불러오는 것, 인과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시작점을 만드는 것입니다. 창조적 문해력이란 바로 이 시작 능력을 언어와 의미의 영역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를 읽는 수많은 독자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주어진 이야기를 따라가고,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하고, 마법 세계를 즐깁니다. 이것은 '노동'에 가깝습니다. 즐겁지만 반복적인 소비 활동이죠. 어떤 독자는 더 나아가 독후감을 쓰고, 등장인물을 분석하고, 주제를 정리합니다. 이것은 '작업'에 가깝습니다. 텍스트를 가공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입니다. 그러나 권력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진 그 아이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는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담론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다른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토론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다른 작품을 읽는 방식까지 바꾸어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작의 힘입니다.
픽사의 창조적 재배치
픽사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창조적 재배치의 힘을 탁월하게 보여줍니다. 픽사의 천재성은 기술력이 아니라 바로 이 '의미의 재배치' 능력에 있습니다. 『토이 스토리』를 생각해봅시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장난감이 살아 움직이는 판타지입니다. 하지만 픽사가 진짜로 한 일은 "버려지는 것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본적 두려움을 장난감의 세계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우디가 앤디에게 잊혀질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가진 관계의 상실에 대한 공포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잊혀질까 봐 두려워하고, 연인이 상대에게 잊혀질까 봐 불안해하며, 직장인이 회사에서 대체될까 봐 걱정하는 그 감정입니다. 장난감이라는 낯선 맥락에 놓였을 때, 이 두려움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만약 픽사가 중년 남성이 젊은 신입사원에게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회 비판 드라마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난감의 이야기로 만들자,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그 감정을 순수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사이드 아웃』(2015)은 더욱 놀라운 재배치를 보여줍니다. 픽사는 심리학의 기본 정서 이론을 가져와, 감정들이 주체가 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까칠이가 라일리의 내면에서 협력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감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특히 혁명적인 것은 '슬픔'의 재발견입니다. 우리 문화는 오랫동안 슬픔을 억압해야 할 부정적 감정으로 여겨왔습니다. "울지 마", "슬퍼하지 마",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이 공감의 근원이며, 관계를 회복하는 핵심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라일리가 부모에게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표현할 때, 가족은 다시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감정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이해를 바꾸어놓는 담론의 창조입니다. 『인사이드 아웃』을 본 부모들은 아이에게 "슬퍼도 괜찮아"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수백 권의 심리학 서적보다 더 효과적으로 문화를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픽사는 기존의 개념과 이론과 경험들을 새로운 맥락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를 생성하는 힘입니다.
뱅크시의 전복, 맥락을 바꾸면 의미가 바뀐다
영국의 거리 예술가 뱅크시는 맥락의 변화가 어떻게 의미를 창조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2018년 10월, 소더비 경매장에서 뱅크시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가 104만 파운드(약 15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그런데 낙찰 직후, 작품이 액자 속에 설치된 파쇄기에 의해 반쯤 잘리기 시작했습니다. 관객들은 경악했고, 경매장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뱅크시는 나중에 인스타그램에 "욕망은 항상 파괴로 끝난다"는 피카소의 말과 함께 이 퍼포먼스의 영상을 올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파괴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술 시장, 가치, 소유, 진정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현장에서 직접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예술의 가치란 무엇인가?", "가격이 매겨지는 순간 예술은 무엇이 되는가?", "파괴된 예술은 여전히 예술인가, 아니면 더 큰 예술이 되는가?"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반쯤 파쇄된 이 작품은 「쓰레기통 속 사랑」이라는 새로운 제목을 얻었고, 2021년 다시 경매에 나와 약 254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가치가 20배 가까이 상승한 것입니다. 뱅크시는 여기서 무엇을 증명했을까요? 바로 맥락이 의미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같은 이미지라도, 그것이 거리 벽에 그려져 있을 때와 갤러리에 걸려 있을 때, 그리고 경매장에서 파쇄될 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창조자의 세 가지 능력
북클럽에서 5년간 수 많은 아이들을 만나며, 저는 창조적 문해력을 가진 아이들에게서 세 가지 공통된 능력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전제를 의심하는 능력입니다. 비판적 사유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텍스트가 제시하는 세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신데렐라』를 읽으면 계모가 악하다는 것을, 『백설공주』를 읽으면 왕자의 키스가 구원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창조적 문해력을 가진 아이는 다릅니다. 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는 『신데렐라』를 읽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계모는 왜 악한가요? 계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새 남편이 전처의 딸만 예뻐하니까 속상했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신데렐라는 집안일만 시키면서 교육은 안 시켰잖아요. 어쩌면 계모가 친딸들한테는 교양 교육을 시키면서 신데렐라한테는 집안일만 시킨 게, 신데렐라를 아예 경쟁 상대로 생각 안 한 거 아닐까요?"
이 아이는 이야기가 당연하게 만드는 선악 구도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비판적 읽기를 넘어선 창조적 읽기입니다.
둘째, 연결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유동적 사유입니다. 창조적 문해력을 가진 아이는 텍스트를 고립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텍스트와 현실을, 한 작품과 다른 작품을,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연결합니다. 한 중학교 3학년 아이는 『동물농장』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이 러시아 혁명을 비유한다는 건 알겠는데, 우리 학교 학생회 선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후보들이 선거 전에는 '학생 인권', '민주적 학교' 이런 말 하다가, 당선되고 나면 선생님들이랑 타협하면서 공약을 안 지키거든요. 그리고 1학년들은 그 과정을 잘 몰라요. 꼭 『동물농장』에서 양들이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만 외치는 것처럼요."
이 아이는 1945년에 쓰인 우화를 자신의 학교와 연결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결을 통해 오웰의 통찰이 여전히 유효함을, 권력의 부패는 세대와 시대, 장소를 초월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셋째, 대안을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창조적 문해력은 "만약에..."라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입니다. 주어진 이야기를 다르게 쓸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한 고등학교 2학년 아이는 『햄릿』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햄릿이 만약 복수 대신 고소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버지 유령의 증언을 바탕으로 클로디어스를 법정에 세웠다면요. 물론 유령의 증언은 증거로 안 되겠지만, 그래도 햄릿이 미친 척하고 사람들 죽이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 같아요.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법이 제대로 작동 안 했으니까 복수극이 나온 거겠죠? 지금 시대에 『햄릿』을 다시 쓴다면, 햄릿은 변호사를 고용해야 해요."
이 아이는 단순히 햄릿을 비판한 것이 아닙니다. 텍스트가 쓰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 맥락이 바뀌면 이야기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신만의 새로운 버전을 상상했습니다.
AI 시대의 대체불가능성
아렌트의 통찰은 AI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합니다. AI는 기존의 패턴을 학습하고 재조합하는 데 탁월합니다. 수백만 권의 책을 학습하여 그럴듯한 답변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는 근본적으로 주어진 데이터 안에서만 작동합니다. AI는 세계를 해석하고 예측할 수 있지만, 세계에 진정으로 새로운 시작을 도입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시작은 기존의 것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약이고, 도약이며, 창조적 사건입니다.
『1984』를 읽고 "자발적 감시"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아이의 사유는 AI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AI는 오웰의 텍스트를 완벽하게 분석하고, 감시 사회에 대한 수천 개의 평론을 종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는 "오웰이 예측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데이터에 없는 것,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Chat GPT에게 "『해리 포터』의 마법사와 머글의 관계가 정당한가?"라고 물으면, AI는 그럴듯한 답변을 생성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 자체를 던지는 것은 AI가 할 수 없습니다. 질문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바로 이 시작 능력, 존재하지 않던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인간을 대체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의미를 생성하는 문해력의 실천
그렇다면 부모와 교육자는 어떻게 아이들을 의미의 생성자로 키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답을 찾는 질문이 아니라 의미를 만드는 질문을 해야합니다.
"이 책의 주제가 뭐야?" (X)
"이 책을 읽고 네 삶에서 떠오른 질문은 뭐야?" (O)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뭘까?" (X)
"만약 네가 이 이야기를 다시 쓴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어?" (O)
"이 인물의 성격은?" (X)
"이 인물이 네 친구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O)
질문의 형태가 사고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정답을 찾는 질문은 아이를 해석자의 위치에 고정시킵니다. 의미를 만드는 질문은 아이를 창조자의 위치로 이동시킵니다.
다음은 아이가 텍스트를 현실과 연결하도록 격려하는 일입니다. 책은 과거에 쓰인 것이지만, 읽기는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아이가 책 속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연결할 때, 그곳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합니다. 한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마틸다』를 읽고 이렇게 대화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마틸다가 교장 선생님한테 당하는 걸 보니까 어떤 느낌이 들었어?"
아이: "화가 났어요. 트런치블 교장이 너무 불공평해요."
어머니: "네 학교에서도 불공평하다고 느낀 적 있어?"
아이: "음...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애들한테만 기회를 주실 때요."
어머니: "그럴 때 넌 어떻게 했어?"
아이: "그냥 참았어요..."
어머니: "마틸다는 어떻게 했지?"
아이: "마틸다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저항했어요. 초능력으로요."
어머니: "초능력 없이도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대화에서 어머니는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이가 텍스트와 현실을 왕복하며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도록 도왔습니다.
다음은 "만약에..."라는 질문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만약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 해리가 슬리데린에 배정되었다면?"
"만약 로미오가 줄리엣의 편지를 받았다면?"
"만약 빨간 모자가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질문들은 아이에게 주어진 서사를 벗어나 자신만의 서사를 창조하는 연습을 시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신데렐라는 평생 집안일만 했을 거예요." 하지만 계속 질문을 이어가면 아이의 상상력은 깊어집니다.
"그럼 신데렐라는 불행했을까?"
"집안일을 잘하면 다른 일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신데렐라가 요리를 배워서 식당을 차렸다면?"
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이런 질문을 거치며 결국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데렐라는 왕자를 만나서 공주가 된 게 아니라, 자기가 잘하는 걸 찾아서 자기만의 성을 지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그게 진짜 해피엔딩 아닐까요?" 이 아이는 동화의 전제 자체를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왕자와의 결혼이 아니라 자기실현에 있다는 것, 구원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 것입니다.
다음은 실패한 해석도 가치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이가 텍스트를 '잘못' 읽었다고 즉시 교정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물으면서, 그 해석이 나온 아이의 사유 과정을 존중하십시오. 한 아이가 『어린 왕자』를 읽고 "왕자가 장미를 버리고 떠난 게 옳았어요. 장미가 너무 까다로웠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입니다. 하지만 저는 즉시 교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물었습니다.
"너는 살면서 누군가가 까다롭다고 느낀 적 있어?"
"우리 엄마요. 맨날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세요."
"그래서 엄마를 떠나고 싶어?"
"아니요... 그냥 잔소리 안 했으면 좋겠어요."
"왕자는 왜 장미를 떠났을까?"
"음...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장미가 자기를 정말 좋아하는 건지 몰라서?"
"그럼 네가 느끼는 엄마의 잔소리는?"
"엄마가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죠?"
아이는 자신의 '잘못된' 해석을 통해 오히려 텍스트의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사랑은 때로 짐이 되고, 관계는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해석이 텍스트에서 놓친 무언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다음은 다양한 해석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같은 책을 읽은 여러 아이들의 해석을 모아서 비교해보십시오. 북클럽에서 종종 수업하는 방식입니다. 『곰 사냥을 떠나자』(원제: We're Going on a Bear Hunt)라는 그림책을 읽고, 각자 "곰이 상징하는 것"을 적어서 벽에 붙였습니다.
- "두려움" (가장 많은 답)
- "모험"
- "아빠와의 추억"
- "극복해야 할 과제"
- "잃어버린 동생" (한 아이의 해석)
마지막 해석을 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책에서 가족들이 곰을 찾으러 가잖아요. 근데 곰을 만나자마자 도망쳐요. 만약 곰이 정말 무서운 거였다면 애초에 왜 찾으러 갔을까요? 저는 곰이 잃어버린 동생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찾고 싶지만 동시에 무서운 거요. 가족들이 동생을 잃은 슬픔을 아직 마주할 준비가 안 된 거예요."
다른 아이들은 숨죽이며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지막 장면이 다르게 보여요. 가족들이 '다시는 곰 사냥 안 가'라고 말하는 게, 슬픔을 마주하지 않겠다는 거네요." 한 아이의 창조적 해석이 다른 아이들의 읽기까지 바꾸어놓은 순간이었습니다.
창조자의 세계관, 대체불가능함의 완성
의미를 생성하는 문해력을 가진 아이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교과서도, 뉴스도, 부모의 말도 하나의 관점일 뿐임을 압니다. 그리고 다른 관점이 가능함을 압니다. 자신을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능동적 창조자로 인식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가 아니라 "나는 이런 가능성을 본다"고 말합니다.
타인과의 대화를 경쟁이 아니라 공동창조로 여깁니다. 다른 해석은 틀린 것이 아니라, 함께 더 풍부한 의미를 만들어갈 동료의 관점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해석보다 자신만의 해석을 시도하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아이는 AI가 제시한 답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을 자신의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며, 필요하다면 완전히 새로운 답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통찰, 세계를 다시 쓸 수 있다는 믿음
니체는 "세계는 우리가 해석하기를 기다리는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다시 쓰는 텍스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주어진 세계를 읽는 해석자로 머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다시 쓰는 창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AI는 기존의 모든 텍스트를 학습하고, 그것을 재조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AI는 존재하지 않던 의미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AI는 주어진 패턴 안에서 작동하지만, 패턴 자체를 바꿀 수 없습니다. AI는 세계를 해석하지만, 세계를 다시 쓸 수 없습니다.
진정한 대체불가능성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능력,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능력,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능력. 이것이 창조적 문해력이며, 이것이 우리 아이들을 AI 시대의 창조자로 만드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하나의 믿음이 있습니다.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나는 그것을 다시 쓸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야말로 대체불가능한 존재의 세계관입니다.
당신의 아이는 세계를 읽는 존재를 넘어, 세계를 새로 쓸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을 외우는 교육이 아니라, 질문을 만드는 교육입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훈련이 아니라, 새로운 텍스트를 창조하는 경험입니다. 완결된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가능성을 펼쳐나가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