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에 생긴 구렁텅이라고.
신뢰가 회복되는 시간은 길었다.
사실 몇 줄의 글로 적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길고 깊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몇 년 동안이나, 번번히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이 없는 깜깜하고 지저분한 말들이 뒤섞인 구렁텅이에 빠지고 나서야 '너 뭐 하는 거야. 얼른 나와.'라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주로 혼자서 살림을 하는 시간에 자주 그 구렁텅이에 빠졌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방을 닦다가도, 요리를 하다가도 그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 구렁텅이는 내가 설거지를 하는 자리, 방을 닦는 순간, 요리를 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옳지. 어서 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나를 빨아들였고, 나는 비실비실 잘도 걸어 들어갔다.
그 구렁텅이에는 늘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불행의 레퍼토리. 피해자 레퍼토리. 맨 처음 신랑을 만나서 연애를 하던 순간을 기억하며 내가 교무 선생님에게 '00 고등학교 행정직은 공무원이 아니라고, 잘릴 수도 있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아라'는 얘기를 듣고, 그날 밤 울면서 신랑을 찾았을 때 신랑은 '나는 잘릴 위험 없다, 공무원이랑 똑같다고, 벌만큼 번다고 나를 설득했었잖아.' 그때부터 속았던 거야. 처음부터 거짓말이었어. 겨우 2년 만에 공무원이랑 똑같다던 데를 쫓겨나듯이 나왔잖아. 그리고는 공무원 시험공부한다고 하고는 나 몰래 주식을 했어. 집을 담보 잡히다니.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태연하게 나를 속일 수가 있지?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며 살았는데. 자기 멋대로 00광역시로 취직해서 나와 아이들을 두고 가다니. 어떻게 이렇게 책임감이 없을 수 있지. 취직하고도 공무원 시험공부한다더니 책은 쳐다도 안 보고 매일 저녁이면 술 약속. 꼴도 보기 싫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기껏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겨우 이런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꼴이라니. 늘 나한테 '말을 심하게 한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말하게 만들잖아. 내가 어떻게 곱게 말할 수 있겠어. 착한 척, 나에게 져주는 척하더니 제 뜻대로 거짓을 말하며 나를 농락했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했잖아. 퇴사도. 주식도. 취직도. 그럴 거면 나는 돈이 많은 남자를 골랐어야 했어. 그렇다면 이렇게 하녀처럼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고 아이들 육아도 전부 내 몫이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이쯤 생각이 깊어지면 상당히 구렁텅이가 깊이 들어서서 눈앞이 잠깐 까매지고, 머리가 지끈지끈해지는 것이었다. 몸으로 통증이 오자, 나는 '아, 너무 깊이 왔다. 젠장. 또 여기를 들어오고 말았어. 나가야 해. 여기는 해로워. 도대체 왜 또 빠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흔들고, 이런 생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피해망상이라고 이성을 찾고 현실로 돌아오려고 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들 이름도 부르고, 어디를 가고 싶냐고 말을 걸며 주의를 환기시키며 또 반복해서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 것을 후회를 했다.
신랑은 퇴근 후에 지인들을 만나 술을 자주 마셨는데, 술자리를 마치고 들어가며 나에게 '이제 들어간다'는 전화를 하지 않는 날이면, 그 구렁텅이는 스스로 공간을 넓혀 내가 가는 모든 곳을 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들고 나왔다. 주말부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는 점. '그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알아. 무슨 일이 있을지.' 그런 날이면 우리는 늘 싸웠다. 신랑은 늘 같은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나와서 신랑을 이 잡듯이 잡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지. 그 구렁텅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불신의 구렁텅이니까. 신랑은 그 구렁텅이가 왜, 언제부터 생겼는지 얼마나 자주 빠지는지 설명을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맨날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내가 자기를 못 믿게 된 거잖아. 자기 때문에 생겼다고. 내가 자기가 주식하고, 취직해서 멀리 가버리고 그러기 전에도 이랬어? 나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 그때 생긴 거라고.", "그러니까 언제까지 그 얘기하냐고. 좀 그만하라고. 정신병 아니야? 정신과에 가 봐."
그래서 정신과에 갔었던 것이다.
나도 내가 좀 심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신랑이 '정신병'이라고 했을 때, 정말 정신병이면 어쩌지 싶기도 했다. 똑같은 구렁텅이에 계속 빠지는 정신병. 나도 안 빠지고 싶은데, 계속 빠지게 되는 걸 어떻게 해. 내 의지대로 안 되면 그게 정신병이잖아.
의사 선생님이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셨을 때, 내가 왠지 이걸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이 구렁텅이는 약 안 먹어도 시간 지나면 없어지는 거예요. 별거 없어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자꾸 빠지지만 않는다면, 그 구렁텅이는 저절로 매일 작아지는 녀석이었다. 어느 순간에는 '그게 있었나.' 싶어지는 때가 왔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위험한 순간이다. '아, 맞다. 있었던 자리가 어디더라.'하고 찾는 순간이 나를 유혹하는 때라서, 들어가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피해 다니고 있다. 피해의식을 갖지 않고 주체적으로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면 된다.
"네가 선택해서 한 결혼이야. 되돌릴 수 없다면, 아이들을 보고 예쁘게 키우면서 잘 살아야지. 시간 지나면 다 별 거 아니게 될 때가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