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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Sep 14. 2020

꿈 속에서 걷기


우이천에는 돌다리가 있다. 돌다리를 건너다보면 돌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날개를 접고 서있는 사람만한(믿거나 말거나) 외가리도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물 속에 들어가볼 수도 있다. 돌은 워낙 크고 단단해서 "돌다리도 두들여보고" 건너는 사람은 없다. 돌다리를 건너는 노부부, 어린 꼬마들도 자주 본다.


강아지도 돌다리를 건넌다. 오늘은 목줄을 하고 주인과 돌다리를 건더는 두 마리의 강아지를 보았다. 경쾌하게 발을 놀리며 폴짝 폴짝 뛰어가는데 어, 이거 무슨 애니메이션에서 본 장면인데, 생각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강아지가 주인을 밀처 물속에 빠뜨리는 장면은 현실에선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나도 돌다리를 건너서 산책길을 따라 걷는데 멀리서 입마개를 하고 걸어오는 진돗개와 주인이 보였다. 산책할 때마다 마주치는 백구와 아저씨다. 백구는 등치가 상당했지만 얌전했고 다른 사람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아침 산책을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도 파트너가 있다. 이웃에 사는 로즈이다. 로즈는 나의 엄마고, 로즈라는 닉네임은 그 때 그 시절의 아이러브스쿨 때부터 쓰고 있다. 엄마의 도서관 아이디도 로즈, 온라인 수업 아이디도 로즈다. 로즈는 우이천 상류에 살고, 나는 하류에 산다. 둘다 아침 산책을 하고 싶지만 혼자 산책을 나올 만큼의 의지력은 없어서 얼마 전부터 산책 파트너가 되었다. 우린 아침에 만날 때마다 알 수 없는 의성어로 인사를 대신한다. 호잇. 워! 허이짜~. 박수를 치기도 한다. 짝짝! 짝짝짝! 뜻 모를 원초적인 인사를 주고 받은 후에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걷는다. 주로 날씨 이야기와 오리 이야기다.  


나 : 저기 오리가 자고 있어.

엄마 : 어머, 정말! 아직도 자고 있네.  

나 : 아, 엄마 너무 빨라. 좀 천천히.

엄마 : 안돼~ 이래야 운동이 되지.


로즈는 걸음이 무척 빠르고, "다리는 바쁘게, 표정은 여유롭게"의 달인이다. 산책하러 나온 나는 운동하러 나온 로즈의 속도에 맞출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혼자 집으로 오는 길에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벤치에 앉아 시간을 엿가락처럼 늘어뜨리며 여유를 찾으려 애쓴다.    


다시 백구와 아저씨 이야기. 백구와 아저씨를 만날 때 인사를 주고 받지는 않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오늘도 나오셨네요." "백구는 볼 때마다 늠름하고 점잖네요."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들도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릴지 모른다. 매일 반복적으로 보면 아는체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의식하기 마련이다. 아저씨는 잘 모르겠지만 백구는 날 보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 같다.  


백구 : 오늘은 머리가 더 뻗치셨네요. 안 씻고 나온 거 너무 티나요.

백구 : 마스크 쓰고 산책하느라 답답하시겠어요.

백구 : 근데 그쪽은 왜 맨날 샌달만 신어요?


나 : 원래 씻기 전 산책이 혈액순환에 좋대요. (근거 없음)

나 : 익숙해지긴 했어요. 백구씨도 입마게 안으로 K94 씌워드릴까요?

나 : 아침에 양말 신기 귀찮거든요.   


이런 대화는 꿈 같지만 진짜일 수도 있다. 꿈은 뭐든 가능하고, 꿈은 현실을 바꾸거나 대체하기도 하니까. 그저께는 꿈에서 뜬금없이 머리를 삭발한 친구가 나왔다. 최근에 가짜사나이를 보며 군대 생각을 해서 그런가. 친구와의 짧은 대화는 이렇다.  


친구 : 요즘 글쓰는 건 어때?

나 : 그냥 뭐라도 써보고 있어.  

친구 : 무슨 내용으로 써?

나 : 아, 모르겠어.

친구 : 비밀이야?

나 : 아니. 그냥 산책하고, 우이천 걷고, 강아지와 오리 이야기?

친구 : 그리고 또?

나 : 음.. 꿈이지만 너 본 것도 쓸 것 같아. 지금 이 상황이 어이없어서 쓰고 싶어졌어.  

친구 : 그건 안돼. 난 지금 몰래 온 거라고.  

나 : 누구 몰래?

친구 : 그것도 비밀이야.

나 : 그냥 쓸래. 싫으면 꿈 밖으로 나와서 막아보던가. 후훗.

친구 : 너 여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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