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비혼

by 순진한 앨리스

1장. 이사


“커피 한 잔씩하고 들 하세요.”

연우는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사서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들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들의 손에 닿는 순간, 캔의 온기가 연우의 손끝을 따라 사라졌다.

혼자서 이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짐을 나르는 것도, 중간중간 마실 걸 챙기는 것도, 밥값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멍하니 짐이 옮겨지는 걸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중 제일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분이 다가와 말했다.

“음료수도 좀 사다 주시고, 수고비도 챙겨주세요.”

연우는 잠시 멈칫했다.

‘여자 혼자라서 더 요구하나?’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일단은 그렇게 따라줬다.

그 후로도 꼬치꼬치 질문이 이어졌다.

“이건 자가예요? 전세예요?”

“혼자 살아요?”

“결혼은 안 하셨어요?”

연우는 애써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마음속엔 작은 파문이 일었다.

이사라는 단순한 일이, 혼자라는 이유로 설명을 요구받는 일이 되어버렸다.

짐이 모두 들어간 뒤, 연우는 텅 빈 거실에 앉아 캔 커피를 하나 더 땄다.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혼자 산다는 건, 이런 질문들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구나.’

그리고는 작게 웃었다.

‘그래도, 이 집은 내 집이다.’

“요즘 세상이 위험하니까, 절대 혼자 산다는 걸 티 내면 안 돼.”
엄마가 늘 하던 말이었다.
연우는 그 말을 떠올리며, 현관 한쪽 끝에 아빠가 생전에 신던 운동화 한 켤레를 내려놓았다.
이삿짐 정리의 마지막이었다.

그 운동화는 오래되어 바닥이 닳았고, 끈도 한쪽이 너덜너덜했지만 연우는 그걸 버리지 않았다.
누군가 현관을 열었을 때 ‘이 집엔 남자가 산다’고 느끼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저 그런 위장.

연우는 그 운동화를 바라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숨겨야 하는 현실.
혼자라는 사실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회.

‘나는 혼자 산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 없다.’

그 순간, 연우는 혼자 살아가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장치를 만들어가며
자신을 지켜내는지를 떠올렸다.
현관에 남자 신발을 두고, 문 앞에 남자 이름을 붙이고,
택배 기사에게 “남편이 받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일들.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었다.

연우는 운동화를 가지런히 놓고,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다 비혼이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
나답게, 조심스럽게, 단단하게.’



2장. 스물여섯


연우가 열일곱이던 시절, 스물여섯은 ‘금값’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나이엔 결혼을 해야 한다고들 했다.

연우도 그렇게 믿었다.

아무리 늦어도 서른 전에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줄 알았다.

예쁜 아기도 낳고, 주말마다 마트에 가고, 퇴근 후엔 따뜻한 저녁을 함께 먹는 삶. 그게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그 시절, 연우는 태성이를 만났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동갑내기 남자. 태성은 다정했고, 뭐든 연우에게 맞춰주는 사람이었다. 연우는 그와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작은 아파트, 나란히 앉은 식탁, 서로의 하루를 묻고, 웃고, 기대는 그런 일상.

하지만 어느 날, 태성은 말했다.

“우리, 그냥 좋은 친구 사이로 지내자.”

연우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투, 표정, 그리고 그간의 공기 속에서

연우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수동적이고 재미없는 연애가 그에게는 더 이상 설렘이 아니었다는 걸.

그 후로도 몇 번의 인연이 있었다.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도 있었고,

결혼 이야기가 오갔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연우는 혼자 남았다.

처음엔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외모가, 성격이, 조건이.

무언가 하나쯤은 모자라서 결혼이라는 문턱을 넘지 못한 거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우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의 선택은, 그때의 마음이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코 틀린 적이 없었다.

가끔씩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연우는 잘 살고 있었다.

그 외로움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계절처럼 주기적으로 다가왔다.

몇 개월은 그저 그런 생활. 일하고, 먹고, 자고, 가끔 웃고.

몇 개월은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했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개월은, 외로움이라는 친구가 찾아와 우울한 일상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친구는 말이 없었지만, 연우의 기분을 천천히 가라앉게 만들었다.

연우는 그 주기를 알아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외로운 시기를 대비해야겠다.’

그녀는 외로움이 올 때를 위해

읽고 싶은 책을 미리 사두었고, 따뜻한 조명을 켜는 습관을 들였다.

냉장고엔 좋아하는 음식들을 채워두었고, 가끔은 일부러 약속을 잡기도 했다.

외로움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은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연우는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미리 이해하고 조용히 준비하며 살아갔다.



3장. 오늘의 연우



연우는 오늘도 알람을 하나, 하나씩 끄면서 마지막에 알람이 울릴 때 겨우 일어났다. 3개의 알람 10분마다 울리면서 30분을 지체는 연우에게 필요한 여유였다.

그래도 아침은 늘 평온했다. 다른 친구들이 아이를 챙기고, 남편을 깨우고, 출근을 준비에 허둥대는 것과 달리

커피포트를 켜고, 새벽 배송으로 도착한 냉동 베이글을 에어프라이에 넣는다. TV 틀어 아침 뉴스를 켠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커피 한잔과 먹는다.

이 작은 루틴이 연우를 안정시켜 줬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아침은 아니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은 아침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며, 연우는 거울 앞에 섰다.

“너 이러니까 아직까지 결혼 못 했지.”

예전에 누군가가 던졌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연우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 말을 지우기 위해, 연우는 늘 단정하게 입고, 꾸준히 운동하고 꾸준히 자기 관리를 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 있었다.

직장에 도착하자,

동료들은 주말에 있었던 가족 모임 이야기로 분주했다.

시댁 이야기, 남편에 대한 불만, 자식에 대한 애정과 걱정들.

연우는 조용히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나랑은 관심사가 역시 다르다.

연우는 요즘 읽은 책, 비혼 여성들의 삶에 대한 기사, 다이어트와 운동 루틴, 혼자 사는 집을 꾸미는 팁 같은 것들이 더 궁금한데...

결혼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에서 관심사가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삶의 구조가 다르면, 그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달라지니까.

하지만 연우는 그 다름이 불편하거나 외롭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저, 자신이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퇴근 후, 연우는 혼자 근처 북카페에 들렀다. 책 한 권을 펼치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관심사가 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를.’

그 순간, 연우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조금 더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연우는 조용히 불을 켜고,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녀의 삶은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자신을 채워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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