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임용 글이라 조만간 내릴 듯/손톱 1 회독 가정
손톱 밑에 갇힌 살갖도 숨쉴 곳이 필요하다
소설의 주인공 소희는 슬픈 사연의 집합체로 느껴진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고, 어머니와 언니가 차례로 빚을 남기고 떠나고, 빚을 갚을 날만을 기다리며 일에 치여 하루하루를 보내는 캐릭터이다.
남들이 당연하게 햇볕을 쬐듯이, 가정을 돌보는 부모님 밑에서 교육을 받고 스펙을 쌓아 사회로 나가는 레일에 박힌 듯 평범한 코스는 소희에게 와닿지 않는다. 탈선을 반복한 소희의 삶에서 잘 깔린 레일은 사치다.
소희와 지하철을 같이 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햇볕이 일상이지만, 소희에게는 통근버스의 노선 위에서 가끔 맛볼 수 있는 달콤함이다. 레일 위에서 산소처럼 여겨지던 가정, 직업, 대인관계, 경제력 중 어느 것도 소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숨을 쉬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만 한다. 자기 손으로 깐 레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삶의 궤도는 다시 저 멀리 튕겨나가게 된다.
소희에게 세상이 유난히 가혹하기에 , 소희는 다치기 쉬운 마음을 희망으로 감싼다. 언니가 돌아올 거라는 희망, 언니와 살아갈 집에 대한 희망, 언니에게 휴대전화 문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떠나간 언니가 소희에게는 터널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햇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도 소희도 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다. 희망이라는 손톱 아래 숨겨 둔 소희의 살갗은 연약해서, 현실에 조금만 쓸려도 쓰라린 듯이 아프다. 그리고 무심하게 스쳐간 현실에, 얇은 손톱은 부러지기도 한다.
엄마와 상의. 따듯한 가정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는 사치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여기서 손톱이 부러진 이유는 이미 내성이 생길 대로 생긴 부러움은 아닐 것이다. 단순히 그 이유는 소희가 사람이기 때문에, 생각도 있고, 힘도 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남직원의 호감도 얻어가며 소통하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손톱으로 덮여버린 피부는 숨을 못 쉰다. 피부는 원래 공기에 노출되어 숨을 쉬며, 긁히기도 하고 베이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건데, 숨을 못 쉰 피부는 연약해지고 작은 상처에도 곪아 버린다.
소희는 햇볕 드는 통근버스를 좋다고서, 볕 드는 통근버스가 좋으면서 슬프다고 하고, 남직원과 여직원들이 이야기꽃을 피울 때 왜 너무 말이 많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드물게 판단이 섞인 어투로,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소희는 모른다' 고 적는다.
소희는 왜 '슬프면서 좋은'게 있는지 알 것이다. 나에겐 좋은 것이 남들에겐 공기처럼 당연하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이 왜 시시덕거리는지도 안다. 누구나 사랑받고 소통하고 싶기 때문에. 소희도 사람이고 마음이 상한다는 사실을 얇디얇은 손톱으로 막을 수는 없다.
마지막에 휴대전화 매장에서, 같은 가난한 처지의 할머니가 소희의 닫힌 손톱을 걱정해 준다. 소희도 사람이기에, 위태로운 레일 위에서도 햇볕을 보고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하기에, 오래도록 가만히 있는다.
Comment
어머니에게 보내는 언니의 문자는 간절하다. 이해한다는 말로, 잘못했다는 말로, 끝내 분노로 점철된다. 그러나 메세지는 어머니에게 닿지 않는다. 다만 소희에게 보낸 한 줄 문자는 소희가 삶을 견딜 한 줄기 빛이 된다
처음에 맥락도 없이 제시된 언니의 문자는, 소희의 심리 상태를 병렬적으로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것 같았고, 언니와 소희가 같이 터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독자는 언니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어머니까지도. 변호는 못 하지만 감정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주는 흐름을, 문자를 매개로 집어넣은 것이 참신했다
기교 이외에도 글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도 쉬웠는데, 통근버스가 가장 좋다는 말이나, 빠듯했던 삶이 틀어지면서 내가 왜?나한테 왜? 를 '짖어대듯' 외치는 소희의 감정선에 이입이 굉장히 자연스러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