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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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버킷랩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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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학의 정수 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대표작 이라는 홍보타이틀로 유명한 이 책은 1948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완결판 설국의 출간은 48년이었지만 사실 [설국]은 작가가 12년전부터 유사한 테마로 써왔던 단편들이 같은 맥락으로 재편집된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2년간 탈고를 거쳤다’ 라고 소개되기도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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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12년간의 탈고 기간 중 출간 직전에 완성된 문장이 바로, 일본근대문학의 가장 강력한 문장으로 남아있는 첫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입니다. 어떤 종류의 문장은 순식간에 쓰여졌다는 이유로 더 빛이 나기도 하지만, 가와바타의 문장은 12년만에 완성되었다는 그 시간의 축적이 문장을 더 빛나게 하는 에피소드가 된 것 같습니다.
노벨문학상 이라는 타이틀이 너무나 강하기에 [설국]이라는 책에는 읽기도 전에 독자로 하여금 많은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뒤로는 소설에 실망을 하는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캐릭터들 간의 관계 대립이나 발전이 굉장히 느리고 미지근하다는 점과, 주인공의 눈이 응시하는 물체에 대한 세부묘사가 아주 디테일하게 이루어져서 이 점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약150페이지의 짧은 소설이지만 읽기 힘들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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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그토록 기대하던 첫문장 이후로는 간단한 상황 설명과 짧은 대화만으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갈피를 못잡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을 재미있게 읽는, 취향이 그다지 확고하지 않은 편이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부터는 가와바타의 묘사가 리드하는 설경의 정취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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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인공 시마무라의 눈으로 온천의 일상을 엿보다보니, 시마무라가 어떠한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는 세상의 ‘헛수고’들을 유별나게 잘 포착하고, 또 그런 “아름다운 헛수고”의 정서에 빠져있는 사람었습니다.
고마코를 절절히 사랑하는 것도, 도쿄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버릴 것도 아니면서 일년에 한번씩 온천에 내려오는 자신의 수고로움이나
시마무라에게 자신과 함께 머물러달라고 하지도 않을거면서 진짜 자기자신을 보여주다가도 이내 거리를 두기도 하고, 자신의 은사를 위해 약혼한 은사 아들의 병치료을 위해 게이샤로써 돈을 버는 고마코의 결론없는 생활이나
죽은 은사 아들을 기리기 위해 매일 그의 무덤을 찾는 요코 모두 결론도 성과도 없는 수고로움의 순환 속에 있는데요.
시마무라는 자기 자신은 물론 고마코와 요코의 수고로움에까지도 구태여 허무를 느끼며 그 허무한 비애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듯 보였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자연이나 벌레들의 순간들 역시 한순간 피고지는, 끝에는 모두 바스라질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아 시마무라, 고마코 그리고 요코가 지나고 있는 시간의 터널들의 허무한 종착의 이미지를 더욱 선명히 해주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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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마무라의 성향을 보고 있으면 멜랑콜리라는 말과 그 어원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나오는 멜랑콜리의 첫번째 의미는 [(장기적이고 흔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감] 입니다. 저는 여기서 특히 [장기적이고 흔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괄호의 내용에 방점을 찍고 싶은데요.
세상을 살다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장기적이고 만성적인 우울이나 슬픔이 느껴지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자신이 그러한 사람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직접 곁에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소설이나 영화, 오늘 처음 본 낯선 사람에게도 이러한 멜랑콜리가 느껴질 때가 있는데요.
멜랑꼴리는 검은색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멜랑(melan)과 담즙을 의미하는 꼴레(chole)의 합성어입니다. 직역하자면 검은 담즙, 검은 쓸개즙 정도 되는데요.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의 체액을 네 가지로 분류해 정의하고 그중 하나인 이 검은 담즙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우울과 비애의 감정이 과도하게 생겨난다고 생각해, 이를 우울증과 같은 병의 원인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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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새하얀 눈이 만든 고요하고 순수한 풍경과 그 곳에서 사랑을 할 것도, 이별을 할 것도 아닌 채로 일년에 한번 마주하는 시마무라,고마코 그리고 요코의 시간들을 통해 허무한 멜랑콜리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펼쳐놓습니다.
굵직한 서사와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매력에 빠지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누군가 마주한 허무함을 엿보고 거기서 느껴지는 비애에 빠져보는 것도 책이나 영화가 독자와 관객에게 선사하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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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면 어느 새 눈의 고장이듯,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시마무라의 허무한 눈으로 설경을 바라보게 만드는 책, 가와바탸 야스나리의 [설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