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데시벨(dB)을 낮추는 일
한적한 시골로 여행을 가면 시골 소리가 난다. 귀뚜라미나 산새 울음 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싸라락거리는 소리, 도로의 정적을 깨는 버스 소리. 평소 도시에 있을 땐 잘 느껴보지 못한 소리가 유독 크게 다가오고, 나는 그 소리들을 만끽한다. 늘 한적한 곳으로만 여행을 다니고 싶어 하는 이유기도 하다. 소음 없이 고요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 내가 고요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일 거다. 도시에도 소리가 있다. 도시를 가득 채우는 소리는 대부분 사람들의 말소린데, 그건 대체로 소리가 아닌 소음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시골의 작은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을 때나, 가만히 평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을 때처럼 내 안이 고요해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도시의 소리가 들린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탑재된 에어팟을 꽤 오래 사용했는데 작년 가을쯤 고장이 났다. 새로 살 정도의 필요는 느끼지 못해 서랍을 뒤져 전에 쓰던 유선 이어폰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리를 완전히 분리해 듣는 것에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바깥의 소리가 뒤섞여 들어오는 것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낯설고 불쾌한 소음에 지친 나는 과감히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는 생활을 택했다.
나는 서울에서 매일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데, 버스에서는 늘 내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말소리에 노출된다. 어떨 땐 그것들이 나들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는 기분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래서 어떨 땐, 버스에서 큰소리로 대화하는 사람을 미워하느라 하루를 다 쓰기도 한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지 나른하고 여유로웠던 것 같다.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 애매한 시간의 북적이지 않는 버스, 적당한 날씨에 적당한 기분, 갈 길이 멀어 일어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는 느긋함.
하교 후 농구를 하러 가는 남고생 무리가 떠드는 소리가 버스를 가득 채웠고 그날은 별로 짜증이 나지 않아 그들의 대화에 귀를 내주고 창밖을 구경했다. 같이 농구하는 멤버로 같은 반의 누군가를 끼울지 말지로 시작한 대화는 한 달 용돈 이야기로, 오늘 농구가 끝나면 돈을 모아 치킨을 사먹자는 이야기로,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 집이 비는 한 친구의 집 냉장고에 캔맥주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로 옮겨갔다. 서른 중반의 나는 더 이상 하지 않는 얘기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땐 나도 그랬지' 같은 노인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공짜로 누렸다. 소란스럽던 그들이 우르르 내리고 난 뒤에도 버스 안에는 신기하게도 그 무리의 여운이 조금 남아 있었다.
며칠 뒤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유독 조용했던 퇴근 시간 버스에서, 내 뒷자리에 앉은 중년 남성이 어린 아들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 창문에 머리를 기대놓고 가만히 들었다. 내가 할 리도, 들을 리도 없는 낯선 말들이었다. 꼭 미지의 단어 같았는데, 무척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모르고 살고 있었는데 내 세계까지 와닿지 못했던 갖가지 세계들이 제각기 다정하게 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선택한 소리를 듣고 산다. 취향을 향유하고, 취향을 벗어나는 것들은 삶의 알고리즘에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지독할 정도로 알고리즘의 보호막 안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와 상관없는 소리는 단지 소음일 뿐이다. 값비싼 전자기기로 차단하고 싶은 세상, TMI라는 무심한 단어로 저 멀리 밀어두고 싶은 세상 말이다. 그러니 바쁘고 지친 사람들이 필요한 소리만 선택해 듣고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가기 바쁜 이 도시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소음뿐인 공간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마음이 소란하지 않은 날보다 소란한 날이 많은 나는 그날의 다정했던 소리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하지만 이어폰 바깥 세상의 소리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요즘, 때로 그 소리들에 섞여 들어 하루를 보낸다. 도시의 소리를 듣는 건 알고리즘이 내게 가져다주지 않는, 부지런히 세상을 채우고 있는 미지의 존재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담아두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소음들을 잠재우고 다정한 소리들을 불러내는 건, 아마도 내 마음의 데시벨이 하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