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는 아니지만
나는 삼십대 중반이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용돈을 받지 않았으니, 스무살부터 지금까지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아르바이트를 한 번에 3개씩 하기도 했다. 지금의 직업을 갖고 정착한 뒤에도 나는 일을 쉰 적이 없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2~3달씩 쉬면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동료나 선배들을 보며 신기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일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도 나는 백수가 되는 순간이 가장 두렵다. 프리랜서인 내게 그 순간들은 필연적으로, 반복적으로 오기 때문에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세컨잡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을 정도다. 거창한 이유랄 거까진 없고, 그냥 나는 노동하지 않는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스스로 쓸모를 느끼기 어려운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희한한 건 그렇게 일벌레처럼 살아온 내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다는 건데, 보통 나랑 비슷한 궤도로 살아온 사람들에겐 '몇 살까지 1억 모으기', '종잣돈 마련하기', '내 집 마련' 같은 꿈들이 있었고 대개는 그걸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거나 집안의 빚을 갚는 가장이거나. 나는 오롯이 내 몸뚱아리 하나만 건사하며 살았으나, 실제로 주택청약을 제외한 적금 통장 하나 없고, 내 집은 커녕 월셋집도 없어 아빠에게 얹혀 살고 있고, 재테크가 될 만한 나이키 신발이나 샤넬 가방 같은 건 더더욱 없다. 주변에서 '그러니까 묶인 돈 말고 지금 당장 쓸 돈이 없다는 거지?' 라고 물을 때마다 '아니 그냥 없는데요' 라고 대답하면서 그 뒤에 부연할 말을, 어떤 이유를 계속 찾아야 했다.
어떤 날은 나도 정말 궁금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생각은 뭘.. 너무 명확했다. 나는 그때그때 내가 가진 돈으로 가질 수 있는 그 순간들의 행복들을 꾸준히 결제했다. 미래의 어떤 순간을 위해 지금을 인내하는 건 별꼴을 다 보고도 참아 넘겨야 하는 일터에서면 족하지 않나.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은 아주 잦은 빈도의 소소한 행복들로 쭉 이어져 왔고 너무 잘 살았다고 하겠다. 후회 없고 결핍 없는 시절들이었다. 이런저런 사정들과 사람들과 사건들이 많았지만, 전자기기에도 화장품에도 명품에도 해외여행에도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주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고 재밌는 걸 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내가 가진 돈을 할애했다. (좀 웃기지만 나는 늘 평정심을 찾아 헤매는 평정심 헌터다.ㅎ)
지금 생각하면 남지 않은 것들이 없다. 그 모든 시간들이 나를 이루는 세포가 됐고, 그 시간들을 지나 나는 내가 됐으니까. 무척 다행히도 내가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 데에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데에도, 그리고 작사를 배우는 데에도 빈틈없이 영향을 준 시간들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 먹도록 돈 안 모으고 뭐했냐고 묻지 마세요.
뭐하긴요,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