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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Oct 20. 2024

의지할 건 헤드라이트 시야밖에 없더라도

제주에서 1

작년 10월, 일 때문에 제주에 갔었다. 직장 생활 10년 여 만에 제주 출장은 처음이었다. 마침 일정이 금요일로 잡혔기도 해서, 오후는 반차를 쓰고 주말까지 제주에 머물게 됐다. 마지막으로 제주에 갔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이었음에도 나는, 솔직히 이번 출장이 좋기보단 막막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일들로 마음을 졸이며 한 치 앞을 불안해하던 나날이었기에 제주도 출장은 다른 팀원에게 넘기고 난 그냥 서울에 남아서 일이나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마저도 빠르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제주행 비행기에 올라 있던 것이다.


일정이 그리 긴 것도 아니었고, 딱히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도 떠오르지 않아서 아무런 준비를 안 했다. 그냥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다 오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이런 안일한 마음을 하늘이 알아본 걸까. 오전에 제주시에서 업무를 볼 동안만 해도 맑고 파랗고 햇빛이 쏟아져 내리던 제주 하늘이, 일을 마치고 숙소인 성산을 향해 가는 동안 조금씩 어두워졌다. 아직 혼자 운전은 무서워 차도 안 빌리고 한참을 기다려 버스에 올라탄 중이었다. 그 주말 내내 제주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햇빛이 부서지는 것까진 아니어도 바다뷰의 카페는커녕, 그저 숙소 침대에서 넷플릭스를 보고, 아무 뷰도 없는 근처 카페에서 책만 읽다가 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제주에 와있다. 일 년 전 묵었던 그 숙소에, 이번엔 차를 빌려 혼자 운전을 해서 왔다. 작년의 제주가 그렇게까지 나쁜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있는 동안 뭔가 무기력한 존재였던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심지어 돌아오는 날에도 회사 눈치를 본다고 오전에 있는 제일 싼 비행기표를 샀었고, 그 바람에 마지막날 아침엔 딱히 다른 뭔가를 하기 애매해져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빠르게 몸을 실었다. 그러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 마음에 함덕해수욕장에서 잠시 내렸는데, 산지 하루 된 비닐우산만 버리고 말았다. 거세게 불어오는 비바람이 우산을 말 그대로 구겨버렸다. 그게 내 마지막 제주의 기억이 되는 건 싫었다.


아무튼 제주는 아직 내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는가, 이번에도 비다. 나 있는 동안 내내 비란다. 아니, 비만 내리는 게 아니고 바람도 엄청나다. ‘강풍, 풍랑, 폭풍해일 특보 발효 중’이라는 안전안내문자까지 받았다. 어제 공항에 도착했을 땐 정말 막막했다. 가뜩이나 비행기가 늦게 도착해 이미 날도 한참 저물었는데 이 비바람을 뚫고 약 한 시간 거리의 숙소까지 혼자 운전을 해서 잘 갈 수 있을까. 사실 일 년 전 운전을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고 해서 그 사이에 운전은 꽤 많이 했고, 꽤 많이 늘었다. 다만 이렇게 비바람과 어둠의 콤보 상황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쏘카로 예약을 하며 보험은 자기부담금 70만 원짜리 가장 싼 보험을 들었는데, 그냥 제일 비싼 걸로 할 걸 벌써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나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어디로도 데려다주지 않겠지. 일단 시동을 걸고 내비에 목표를 찍었다. 버스로 갈 땐 제주도 서쪽 해안을 따라 크게 둘러 갔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엔 안쪽으로 들어간다. 산 쪽은 왠지 더 힘들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최적의 길이라니 일단 따라가 보기로 한다.


오히려 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는 많이 없었다. 그런데 차가 없다는 게 더 무서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내를 벗어난 차는 간간히 가로등도 없는 도로를 달렸는 데, 앞에 다른 차라도 있으면 그 차의 궤적을 보며 따라 달릴만했지만 아무 차도 없으니 정말 한 치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도로는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또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이어졌는데, 아무리 내비가 있다 하더라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바로 눈 앞 그 다음에 어떤 코스가 펼쳐질 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딱 그만큼의 시야에만 의지해야 했다.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에 어둠은 더 짙게만 느껴졌다. 왕복 1차선 도로의 양 옆으로는 무성한 나무 숲이 이어졌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무서움이고 뭐고 일단 빨리 쉬고 싶었다. 갈증도 나고 그보단 엄청난 허기가 몰려왔다. 짐을 풀고 숙소 가까운 펍에 가서 맥주와 간단한 요기를 했다. 맥주와 감자튀김이 이렇게 맛있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앞으로 3일 동안 계속 혼자 운전을 해서 제주를 다녀야 한다. 첫 운전이 너무 빡세서 그런지 조금 자신이 붙었다. 아무튼 차가 생겼으니(?) 똑같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라도 이번엔 조금 다른 제주를 보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쓰다 보니 또 좀 일기 같은 글이 되어버렸는데, 그래도 여기에 머무는 동안 매일 한 편씩 이렇게 글을 남겨 보기로 한다. 자꾸 해야 느는 운전실력처럼, 이번에야 말로 글쓰는 습관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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