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짱없는 베짱이 Feb 18. 2019

오늘 밤 이 돈을 다 써버리고 싶을 때

[고독한 개짱이] 평양냉면


발품을 팔고 다닌 게 효과가 있긴 했다. 그중 한 부동산에서 조건에 맞는 매물 목록을 정리해서 보내줬고, 주말을 틈타 한 번에 다 돌아보기로 했다. 집을 제대로 보러 다니는 건 처음이다. 혼자서 좋은 집을 잘 판단할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인 나를 위해 이미 그 동네에 나와 살고 있는 한 친구가 동행을 해줬다.


화장실 물을 틀어보랬고, 변기 물도 내려보라 했고, 방에 불도 켜보고, 그리고 내게 중요한 것이라면 창문이다. 창문이 너무 작진 않은지, 열 수 있는지, 열어도 괜찮을 정도로 옆 건물 사이에 공간이 확보되어 있는지. 그러나 집을 보고 다닌 적이 없었으니 다른 건 도통 감이 안 잡힌다. 특히 짐이라도 많고 정리가 안된 집을 보고 있으면 일단 다 좁고 안 좋아 보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내가 어찌할지 모르는 동안 친구가 구석구석 살피며 곰팡이 자국이 있네, 환풍기가 안 돌아가네, 매의 눈이 되어 문제점을 찾아냈다. 대체로 화장실 혹은 주방 쪽을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곳은 남자 혼자 사는 방이었는데, 나오자마자 부동산 사장님부터 고개를 저었다. "저분 집안에서 담배를 엄청 피나 봐요. 온 벽지가 누렇게 변색됐네." 이미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살 집을 찾는 것보다는 살지 못할 집을 걸러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종일 둘러본 결과 그래도 마음이 끌리는 집이 하나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은 오늘 매물로 나온 곳이라 나한테 처음 보여준 것이라며, 이 금액대에 이 정도 집에 위치에, 정말 구하기 어려운 좋은 조건이라고 했다. 망설여지는 곳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가 정말 그 집을 놓쳐선 안될 것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나 내 발목을 잡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거긴 내가 정해놓은 예산을 넘어서는 집이었다.


*내가 젤 좋아하는 필동면옥과 을지면옥의 원조라는 의정부 평양면옥의 평양냉면. 죄다 한 그릇에 만원이 넘는다. 


싱어송라이터 씨 없는 수박 김대중 씨의 노래 중에 300/30이라는 명곡이 있다. 이게 이미 5년도 더 된 노래니 이제는 서울에서 300에 30짜리 방을 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돈은 없지만 집이 필요한 우리의,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려지는 것만 같다.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은 옥탑으로,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것 같은 지하실로 방을 보러 다니면서도 먹고 싶은 것은 평양냉면. 그냥, 오늘 밤 이 돈을 다 써버리고 싶단다. 그렇지 내 눈앞에 현실이 초라하다고 좋은걸 모르는건 아니지. 바라는 것마저 초라할 순 없다. 아니, 그리고 그 냉면 하나 먹는다고 여기서 얼마나 더 기준을 낮춰야겠어. 심지어 300/30이라도 그때도 지금도 이건 분명 적은 돈이 아닌데!


평양냉면의 세계에 눈을 뜬 게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대학생 때 친구를 따라 처음 맛을 보았던 것 같다. 처음엔 밍밍했는데 먹을수록 진하게 감칠맛이 도는 국물, 뚝뚝 끊어져 먹기도 쉬운 데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도는 면발에 반했다. 왜인지 평양냉면집은 보통 냉면집보다 많지도 않고 심지어 비싸기까지 해서 자주는 못 먹지만 취업을 하고 첫 월급을 탔을 때, 누군가의 생일에 선물 대신으로, 그렇게 한 번씩 찾으며 먹을 때마다 감탄을 했더랬다.


그날 부동산 사장님과 헤어지며 그 집에 들어가고 싶다고 부족한 예산을 어떻게든 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 그 집이 마음에 든 건지,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건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족한 예산을 어디서 구한단 거였는지, 말대로 예산을 늘일 수 있었다면 애초에 더 좋은 집을 찾아보려 했을텐데.

며칠 후 다시 전화해서 아무래도 그 집은 내 것이 아닌가 보다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처음 말했던 나의 예산에 맞춰서 조금 더 알아봐 주십사 요청을 드렸다. 그래도 요즘엔 과거 그때보다 좀 더 평양냉면을 자주 쉽게 먹고 있다. 내 예산도 300/30보단 여유롭다. 이런 날이야 말로 정말 평냉 먹기 좋은 날이 아닌지.




매거진의 이전글 내 접시엔 내 맘대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