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나, 알사탕, 책읽는곰, 2017.
아이가 일곱 살일 때였다. 부쩍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죽는지 엄마아빠가 죽는지, 나아가 자기도 죽는지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가 충격받지 않으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답하려 애썼다. 장황하게 설명해 봐야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고 너무 무심히 대답하면 또 그것 나름 의아하게 여길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가장 '중간'의 자세를 취하려 했다.
"엄마아빠도 죽어?"
"그럼. 근데 지금은 안 죽어. 아주아주 나중에."
이런 식으로 가끔 대답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가 또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도 죽잖아. 죽으면 하늘나라 가잖아. 그러면 나 망원경으로 하늘나라 볼 거야."
"정말? 그런 다음에 뭐 할 건데?"
내가 물었다. 자기보다 아빠가 먼저 죽을 것이 걱정이 되는 게 틀림없었다.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뭐 하고 노는지 볼 거야. 그리고 아빠가 다시 태어날 거잖아."
아이는 어디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인지 환생을 말하고 있어 내심 놀랐다. 그러니까 아이가 인식하는 사후세계는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놀고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다시 태어난 곳을 망원경으로 딱 봤다가 거기로 아빠를 데리러 갈 거야."
"데리고 와서 뭐 할 건데?"
"우리 집에서 놀아야지! 아빠랑!"
마음이 콩, 하고 내려앉았다. 아이는 그 누구라도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술기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몸으로 깨우쳤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아빠는 인간이라면 한 번쯤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예외를 둘 수 없었을 거다.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죽은 아빠가 다시 이 세상에 올 때 만나는 것밖에 없었다.
아빠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이 귀엽고 갸륵했다. 아이에게 아빠의 죽음은 피하지 못할 '사실'이므로 제 딴에는 그 슬픔과 충격을 완화할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아빠를 다시 찾아내고자 했다. 그러면 아빠는 죽고 또 죽어도 자신은 아빠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아이답게 아빠와의 이별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 제법 놀라웠다. 이렇게 아이는 아빠와의 재회를 설정하고(상상하고) 안도했을 것이다. 그것도 다시 아기가 된 아빠 말이다. 아이가 만든 세계가 아름답고 슬퍼서 마음이 일렁거릴 수밖에.
이 세상에서 아빠를 제일 좋아하는 아이는, 시계도 볼 줄 모르면서 귀신 같이 아빠의 퇴근 시간을 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아빠 언제 와?"라고 묻는다. 야근이라도 하는 날에는 몇 번이고 더 묻는다. "아빠 언제 와."
아빠
아빠
아빠
아이는 숨 쉬듯 아빠를 부른다. 아빠는 아이 말에 대답하느라 집에 와서도 쉴 틈이 없다. 아이 옆에서 앉아 미니카를 같이 밀어주고, 그림을 같이 그리고,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무조건 아빠처럼 되고 싶어 했다. 얼른 수염도 나고 싶어 했고, 아빠 따라서 해보겠다며 티브이 리모컨으로 턱을 밀며 수염 깎는 흉내를 내곤 했다. 종아리에 아주 얇은 솜털이 났었을 때는, 드디어 아빠가 된 거냐며 발을 구를 듯 좋아했다. 아빠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한 아들은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저녁 무렵이면, 아빠 언제 오세요? 묻는다.
매일 같이 하는 그 말이 섭섭해 속으로 너는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아빠만 찾냐,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남편은 아버지가 해외에서 오래 일한 탓에 부성애를 깊이(자주) 느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놀이동산을 가거나 단둘이 여행을 간 기억 같은 것도 없다. 아버지와 토요일 오후에 게임을 하거나 공터에 나가 축구공이라도 차본 기억도 전무하다.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남편은 유년시절 늘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꼈다. 그렇기에 아이를 낳은 후 남편은, 자신에게 남겨져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는 아버지가 되고자 했다.
한 마디로 "우리 아빠랑 반대로 했어"란다.
시아버지가 들으시면 섭섭할 이야기이겠지만, 남편의 말은 이보다 더 솔직 담백할 수 없다.
그러나 왜 아니겠는가. 시아버지 알사탕이 있다면 그 알사탕이 사르르르르 녹는 동안 아들에게 하고 싶어도 참았을 무수히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겠지.
"아들아,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번에 시험을 잘 봤다며, 대견하구나. 어디 아픈 데는 없지? 늘 엄마를 돕고 자기 할 일 잘하며 지내줘서 고맙다. 보고 싶구나."
그러겠지. 속마음은 '속'에 있어 안타깝다. 오물오물 알사탕을 녹이는 시간 동안, 우리는 또 누구의 마음을 갸륵하게 여겨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