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11

레슬링과 대통령

by 김병호

13. 레슬링과 대통령


뒷방을 나와 다시 마당으로 돌아오면 작은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항상 일을 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만난다.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엄마는 널고 돌아서면 나오는 빨래를 밀고 있거나 후딱 비는 김칫독을 채우기 위해 배추를 씻거나 돌절구에 삶은 콩을 넣고 절구대로 찧고 있다가 아들 중 하나가 밖에서 소리를 지르면 대문을 열어주러 뛰어나갔다. 그렇게 잠깐 엄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라이에 가득 찬 수돗물이 넘친다. 수도꼭지를 잠그러 다가가면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한다.


빗소리는 요란하지만 비를 맞지는 않는다. 작은 마당을 덮고 있는 꽤 큰 우산이 있기 때문이다. 마당 네 구석으로 높이 2m가량의 쇠파이프가 박혀있고 그 끝은 다시 굵은 쇠파이프로 연결되어 큰 사각형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공중에 만들어진 사각형을 가로질러 다시 대여섯 개의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매달려 노는 구름다리를 크게 만들어놓은 모양이다.

좀 촌스러운 파란색 페인트칠이 된 이 기둥 위에는 주름진 플라스틱 슬레이트 여러 장이 얹혀있어 비를 가린다. 비가 오면 막대기로 밀어 올리면서 살살 당겨 마당 전체를 가리고 해가 나면 다시 밀어 슬레이트들을 한 곳에 모은다. 그러나 높이가 있고 주름진 슬레이트 때문에 막대기로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때 쌍둥이들이 등장한다.


두 인간 원숭이(기분 나쁘게 생각 말라. 기능적으로 탁월하다는 뜻이다.)들은 기둥을 맨발로 조인 후 몸을 뻗어 윗부분을 손으로 당기면서 다시 발을 끌어올리는 동작 두어 번이면 이미 높은 구름다리 위에 발을 딛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걸어 다니면서 슬레이트를 바르고 아귀가 맞게 조정했다.

사실 이렇게 공익적 목적을 가지고 올라가는 일보다는 그냥 놀기 위해 매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본 쇠파이프들은 맘껏 풀 뜯은 소의 배처럼 전부 둥근 모양을 하고 아래로 처져있었다. 누가 더 빨리 올라가나 내기를 하고, 매달려 서로를 떨어뜨리려 싸움을 하고, 위에서 봉 사이를 뛰어다니는 묘기를 하고, 내친김에 기와를 얹은 지붕 위로 건너뛰는 신기를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쇠로 만든 파이프일지언정 견딜 재량이 없었다.


거의 원숭이들의 놀이터(역시 기분 나쁘게 생각 말라. 그저 신나게 놀아다는 뜻이다.)를 연상시키는 이런 장면은 거의 매일 상영되었다. 물론 나도 올라가기는 했지만 날렵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형은 그저 매달려 턱걸이 정도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된 이 철봉들은 비를 막아주고, 뜨거운 여름 해를 가리고, 거의 벗고 뛰는 아이들을 위해 윗집의 시선을 가려주고, 쌍둥이의 놀이터로 버티며 오랜 세월을 견뎠다. 아무리 무생물에게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덕목이야말로 사람의 도리이다.


놀이라고 하면 방안 이불 위에서 벌어지던 레슬링도 빼놓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종적을 감췄지만 어릴 적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대단했다. 민머리 김일 선수가 상대방에 당할 때에는 책상 아래 들어가 스스로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다시 화면을 훔쳐보았고, 그러다 형에게 이제 그 고통이 끝났냐고 물었다. 또 다른 상대방이 반칙을 하기 위해 뒤로 다가가면 텔레비전이라는 사실도 잊고 모두가 소리를 질러 우리 선수에게 알렸으며, 결국 피범벅이 된 이마로 상대에게 박치기를 날릴 때에는 벌떡 일어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승리의 환호를 나누었다.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인 천규덕 선수를 흉내 내어 서로에게 당수를 날리다가 목을 맞고는 캑캑 꼬꾸라진 일도 다반사였고 여건부 선수의 빠른 알밤까기는 따라 하기 적격인 기술이었다. 상대방에게 멋지게 코브라 트위스트를 걸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고 쉽게 풀려버린 후 절대 풀리지 않는 다리 기술을, 사이 나쁜 형제들은 모여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


그즈음 잊히지 않는 사건도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부하의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었다. 불안했지만 그럼에도 동네는 전날과 똑같이 시끌벅적 사람들이 오갔고 아이들은 뛰어다녔다. 신문과 텔레비전은 뒤숭숭했다. 뉴스에서는 할머니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도로에 주저앉아 울었다. 울면서 한 손으로 땅바닥을 쳤고 흰 수건을 쥔 다른 손으로는 코를 닦았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죽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신문과 방송은 북한이 도발할지도 모른다고 잔뜩 겁을 주었고 그래서 잠시 뒤숭숭했지만 우리 넷은 엄마한테 허락을 받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10개를 해치우고 버얼건 라면 국물이 출렁이는 솥에 밥을 말았다. 솥이 바닥을 보일 즈음 누구는 화장실로 달려가고 누구는 철봉에 올랐고 누구는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 놀았다. 행동이 느려 남은 누군가가 밥상을 치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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