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날의 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애진 Sep 29. 2021

잠시 멈추고 생각하시오

정지선과 국가







2017년 11월, 수능이 연기됐다. 물론 2005년과 2010년에도 수능이 미뤄진 적은 있지만, 각각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그리고 G20 정상회의처럼 국제적인 행사와 일정이 맞물려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수능이 치러지기 한참 전에 이미 고지되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한 연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2017년은 달랐다. 수능을 겨우 하루 앞둔 시점에서 일정을 연기하겠다는 결단이 내려진 것이다. 비행기조차 감히 땅을 밟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맴 돌게 하는 강력한 연례행사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대체 왜? 바로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발생한 5.4 규모의 지진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갑론을박했다. 온라인 세계 여기저기가 들끓었고, 억울한 사연들도 속속들이 등장했다. 일정에 맞추어 휴가를 썼던 군인 신분 재수생, 피임약을 복용해가며 생리주기를 조절한 수험생, 수능과 함께 달콤한 휴가를 즐기려다 발목을 잡힌 강사 등등. 어쨌거나 수험생들은 논란 한 가운데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저마다 가지각색의 노력과 최선을 다했다. 몇 년이 흘렀지만 나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볼 때마다 이 일이 떠오른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신호등, 정지선 그리고 서서히 멈추는 차들을 본다. 나는 마치 거기서 국가의 형태가 보이는 것 같아 신기하다. 엑셀을 밟는 건 한 사람의 선택일 뿐인데, 모든 차가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 사람들은 교통법규를 어기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나, 도덕적인 측면에서 기다림을 감내하는 것 같다.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그 속에서 어우러져 사는 개인들의 양보와 인내. 사정 없는 사람 없고, 욕심 없는 사람 없는 거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함께 지켜내는 가치들이 있다.


지진으로 인한 수능 연기가 과연 지나치게 전체주의적인 해프닝이었을까? 그보다는, 국가가 왜 존립하는가 하는 질문에 정부가 제시했던 답변 중 하나가 아닐는지. 선택의 여지 없이 이 나라에 태어난 한 사람으로서, 그 답변이 든든하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생각을 이어나가본다. 공익을 위해 신호등이 우선은 먼저 만들어졌겠지. 한동안은 법의 강제에 의해 공익이 지켜졌겠지. 그러다 도로 위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함께 그 공익이 서서히 당위성의 영역으로 옮겨오지 않았을까? 하며. 


갖가지 일들을 겪어내며 공동체는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스스로 체화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달리는 도로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 여기가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외로워서 일어나는 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