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우는 죽은 길고양이 처리에 대한 영신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행위에 방관자가 되는 것에 동의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영신이 넌지시 건넨 한마디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관심사를 돌려놨다.
'요즘 이상한 일이 생기지 않았나요?'
영신의 한마디가 거꾸로 세운 모래시계처럼 연우의 뇌리를 무수한 상념으로 가득 채웠다. 그녀가 무슨 근거로 했던 말일까? 혹시 금요일 밤 상황을 목격했었나. 돌이켜 보면 폭우가 내렸던 밤 이후로 금요일 밤에 영신 일행이 방문했다는 기억은 없다. 그 자리에 없었다면 도대체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실없는 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게 최근에 연우는 분명 이상한 일을 겪었고 그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어쩌면 오늘 밤에 벌어질 현상을 염두에 두고 영신이 말했다면 연우로선 기이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우연이나 일회적 현상이 아닌 하나의 실체가 되어 자기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신의 방문이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했던 금요일 오후를 세차게 흔들었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을 웃으며 맞이하고 간혹 창밖으로 시선을 두지만 언제나 의식은 한 곳을 향했다. 오늘 밤에 어떤 낯선 여자가 뜻 모를 얘기로 접근할까? 연우는 신경이 곤두섰다.
2.
"잘 지냈니?"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준식한테서 전화가 왔다. 강물이 노을에 물들어 붉은빛으로 굽이쳐 흐르던 저녁 무렵이었다. 눈치 없는 녀석. 금요일 오후의 카페가 얼마나 바쁜데 천연덕스럽게 전화를 하다니. 녀석은 지금쯤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며 룰루랄라 콧노래 속에 퇴근하고 있을 테지. 달리 생각하면 준식이 그럼에도 강변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어쨌든 연우는 그럭저럭 지낸다고 대꾸했지만 아직은 자신이 겪는 이상한 일을 누구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금요일 밤 현상이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다. 몇 번의 우연이 겹친 별일 아니라 여기고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싶었다.
"너 혹시 혜인이 소식 들었니?"
"혜인이?"
오랜만에 외치는 이름이었다.
'혜인'
이제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묻힐 여인. 요즘에 영신이라는 여자를 보면서 언뜻 생각나긴 했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오고 말았다.
"그래 혜인이!"
"왜, 혜인이한테 무슨 일 생겼어?"
"너도 알고 있지? 혜인이 결혼 앞둔 거."
"응, 얘긴 들었어."
연우가 무덤덤히 대꾸하자 준식한테서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혜인이가 사라졌데."
"사라지다니 무슨 말이야?"
"나도 최근에 들었는데 지금 실종된 상태래. 한 달이 다 돼 가나 봐."
준식의 말에 연우는 말문이 막히고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는가 싶어 재차 확인했지만 준식의 말은 바꿀 기미가 없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도 준식 역시 대학 동기 몇몇을 통해 돌고 돌아 전해 들은 단편적인 소식이 전부였다. 그녀가 자초했는지 아니면 외부의 힘이 작용했는 지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준식이 뭐라고 말을 더 이어갔지만 뒷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혜인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을 뿐.
"또 다른 소식이 있으면 연락하마."
"그래."
"너 지금 괜찮니?"
"혼란스럽다."
3.
준식과 통화가 끝나자 연우는 혜인을 생각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과거로 돌아가면 그녀의 결혼 상대는 연우 자신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 시절 연우는 혜인과 연인 사이였다.
"방학 잘 보내세요."
"아, 네....."
2012년 12월. 혜인이와 처음 나눴던 짧은 인사. 대학 1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날 교정에는 첫눈이 펑펑 내렸는데 그녀와 단둘이 마주친 건 다음 학기 수강신청이 끝난 직후였다. ㅁ자 구조의 인문대 건물 3층 어두운 복도는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연우의 발걸음 소리 외엔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또 다른 발걸음 소리가 맞은편에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저편 복도에서의 그녀, 혜인이었다.
우연한 만남에 연우는 당황했지만 두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스쳐갈 것이다. 적어도 연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혜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살짝 놀란 연우는 짧게 대꾸한 게 전부였다. 그녀의 유연한 얼굴이 코앞이었는데 연우가 보인 행동은 맞은편 복도로 향하는 맹목적인 발걸음뿐이었다. 인문대 건물을 나서자 하얀 세상이 펼쳐졌지만 그에겐 낭만적인 기분이 조금도 스며들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 원인 모를 허탈함이 함박눈만큼이나 차갑게 쌓이고 있었을 뿐.
지난 1년간 대학생활 중에 혜인이와 대화를 나눴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우뿐만 아니라 학과 동기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학생들은 물론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연우도 동기생과 자주 어울린 건 아니었지만 학과 모임과 체육행사는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참석했다.
하지만 혜인은 달랐다. 그녀는 한술 더 떠 어떤 행사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학우들이 그녀를 볼 수 있는 날은 강의 시간이 유일할 정도였다. 때문에 건방지고 거만하다는 말도 나돌았지만 그뿐이었다. 혜인이 강의 시간에 보였던 학구열은 교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뜨거웠는데 어느새 학과의 재목으로 대두되었다. 인상에 남았던 강의시간 중 하나는 맬서스의 <인구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맬서스가 책에서 남긴 건 부자들 부의 탐욕에 면죄부를 줬을 뿐이라는 헨리 조지의 주장에 혜인 자신은 동의한다고 밝힌 것이다. 당시에 연우는 맬서스는 들어 봤어도 헨리 조지는 생소했는데 그 직후 도서관에서 그와 관련된 책을 대여했던 때도 생각났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의 올리비아 핫세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그녀, 하지만 학우들과는 애증의 관계랄까. 미워하면서도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묘한 감정을 유발하게 하는 존재였다. 그랬던 그녀가 학년이 끝나는 그 해 겨울 어두운 복도에서 인사를 건넸다. 비현실적인 순간이었고 찰나의 시간이 지나가자 연우에게 돌아온 건 스스로 바보 같다는 자책이었다.
'아, 네'라니.
아무리 당황했다 해도 대답이 너무 한심했다. 좀 더 근사한 답례를 할 수 없었던가. 겨울방학 내내 아쉬운 마음에 질타를 거듭했다. 이상한 건 그녀가 보고 싶다는 간절함은 점점 커져갔다. 혜인한테는 단순히 인사치레였을지 몰라도 다정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같은 대학에 다녔지만 그녀가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지 몰랐고 연락처 또한 알 수 없었다. 그 해 겨울, 몇 번의 함박눈이 내렸지만 연우의 그리움 가득했던 겨울방학은 무미건조하게 지나갔다.
4.
'보고 싶었어요.' 다음 해 연우는 그녀한테 고백하고 싶었다. 지난겨울 속앓이가 근거 없는 명분이라도 되어 혜인 앞에 서는 용기를 주길 바랐다.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교정을 나란히 걷고 오색 창연 꽃밭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실상은 지난해와 똑같은 도돌이표 삶이었다. 혜인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고 강의 시간엔 광활한 지적세계의 바다를 저 혼자 꿋꿋이 항해하고 있었다.
연우는 이도저도 아닌 경계인, 그 해 학창생활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자아 분열이 일어나는 듯 보였고 타인에 대한 갈구가 극에 달해 자아 붕괴의 위험마저 도사렸다. 말하자면 짝사랑을 우습게 봤던 연애 풋내기한테 가혹한 철퇴가 내려진 셈이었다.
"너 누구한테 홀렸니?"
준식이가 당시에 했던 말. 연우는 부정했지만 솔직히 말해 녀석한테라도 그때의 속마음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위로 대신에 키득거리며 자신의 짝사랑을 희화화할 것 같았다. '네가 혜인이를! 하하하~' 그렇게 녀석의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돈다면 자아는 회복 불가의 수렁에 빠질 것이다. 애초부터 사랑은커녕 짝사랑도 못한 녀석한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 있었다. 그렇게 연우의 사랑앓이는 여름이 가고 하얀 코스모스가 피고 원색의 향연을 펼쳤던 나뭇잎이 잿빛으로 지는 가을의 끝에서도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5.
계절은 다시 겨울로 가고 있었다. 첫눈 소식이 아직 없는 햇볕이 쨍쨍한 날 인문대 202호 강의실에선 기말고사가 막 끝나던 참이었다. 연우는 내년 학기 수강신청이 시작되었을 때 강의실을 먼저 빠져나왔다. 연우는 다음 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 휴학계를 내야 한다. 수강 신청할 이유가 없었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혜인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좀 전에 강의실에서 보았던 혜인의 뒷모습이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연우는 이대로 학교 문을 나서기가 싫었다. 작년 이맘때였나. 인문대 3층에 있는 커다란 창에서 함박눈 내리는 교정을 보고 싶어 했던 게. 연우는 갑자기 3층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얀 세상이 아니더라도 화사한 세상이 커다란 창밖에 펼쳐져 있으리라. 돌파구는 그곳 창가에 있는지도 몰랐다. 3층 복도는 그때처럼 조용했다. 그런데, 맞은편 복도에서 정적을 깨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거짓말처럼 지난해 겨울로 시간을 되돌린 것 같았다. 혜인, 그녀가 저편 복도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혜인이 스쳐가기 전에 연우가 그녀 앞에서 겨우 고백한 말이었다.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쳐 간다면 몇 개월 후 훈련소 입소가 기다리고 있을 뿐.
"네?"
혜인이 걸음을 멈추고 연우와 시선을 맞췄다.
"아니. 아... 그냥 뭐랄까?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예전에 그쪽이 말했죠. 헨리 조지에 대해서. 그러니까... 임금은 뭐 자본이 아니라 노동에서 나온다고 했던 말. 아... 그러니까 나도 그것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연우는 덥지도 않은데 온몸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횡설수설하고 있다고도 자각했다. 혜인은 아무런 대꾸 없이 입술을 꽉 다문채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바보 같아."
"네?"
"아... 그러니까 복도에서 나눌 주제는 아닌 것 같다고."
청바지에 아이보리 패딩을 입은 혜인이 예고도 없이 먼저 말을 놓았다. 연우가 했던 말투도 흉내 내며 겨우 웃음을 참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3층 복도에서 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커다란 창에는 유난히 화사한 빛이 감돌았고 연우의 입가에는 환희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 용기가 왜 생겼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반가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훗날에 혜인이 먼저 인사를 건넨 것에 연우가 내심 놀랐다고 말하자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첫눈이 내리던 날 강의실에서 우연히 연우를 봤어. 창밖을 쳐다보던 모습이 마음에 들더라."
연우도 생각났다. 1학년 기말고사가 끝났을 때 교정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세상이 하얗게 변해가는 풍경을 전망 좋은 창에서 보길 원했던가. 인문대 3층 복도 중간쯤이면 가능할 것 같아 그곳으로 향했지만 연우는 바보처럼 그냥 지나갔다. 커다란 창가는 물론 우연히 마주친 혜인이 마저 스쳐가며.
"연우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어. 3층 복도에 있던 커다란 창 있잖아. 그곳에서 본 교정은 어떨까 궁금해지는 거야. 그런데 그곳에서 하얀 눈밭을 걸어가는 자기를 봤다. 뒷모습이 뭐랄까 좀 쓸쓸해 보였어."
6.
그 해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얼마 안돼 연우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혜인이 역시 휴학계를 냈는데 1년간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커다란 창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차례 만남이 정말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인위적 힘이 작용했는지 그 내막을 연우는 알 수 없다. 그 만남에 대해 혜인한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그녀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기야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둘은 그 겨울날, 어떤 방해 없이 밀린 숙제라도 하려는 듯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눈 내리는 거리에서 낯선 예쁜 거리에서 가로등 희미한 골목길에서 시퍼런 하늘 높이 갈매기만 울부짖던 겨울바다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혜인은 커피를 무척 좋아해 아메리카노에서 시작해 카페라테, 카푸치노, 카페모카는 물론 에스프레소 맛집을 찾아가는 카페 순례도 나섰다. 특히 휘핑크림이 들어간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최애로 여겼는데 좁은 골목길 녹색 차양이 있던 아담한 카페에서 만든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그곳은 당시 둘만의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두꺼운 볼테 안경을 쓴 중년의 주인 여자는 손님들로 북적인들 연우와 혜인이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판기 커피를 신봉했던 연우는 혜인을 만나면서 커피의 세계가 무궁무진함을 눈뜨게 되었다.
"혜인아."
"응?"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너를 위해 만들고 싶다."
"정말?"
"응."
"기대한다."
좁은 골목길 녹색 차양이 있던 아담한 카페. 볼테 안경을 쓴 중년의 여주인이 지금도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면 벽면 한쪽 전체를 차지했던 커다란 메모판에는 혜인이 쓴 글이 다음과 같이 남아있을 것이다.
- 2013년 12월 24일, 혜인이와 연우가 처음으로 이곳에 오다!!!
그랬던 둘의 관계는 먼 옛날 사랑얘기처럼 끝났다. 왜 헤어지게 됐는지 당시에는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지만 정작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이유가 모호했고 하찮은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젠 지나간 옛일이 되었다.
누구나 과거는 있을 테고 미지의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그 시간의 흐름 어딘가에서 어떤 변곡점을 거쳤던 까닭에 연우는 혜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연인 사이가 어떻게 끝장났는지 모르게 자신은 과거의 남자였고, 그녀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준식한테서 전화가 오면 수화기 너머로 '혜인이가 짠하고 나타나 청첩장 돌린대~'하는 소식을 간절히 원했다.